by 이봄


귓전을 맴도는 말 중에 달콤한 말이 섞여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사랑스러운 말투와 애교 묻어나는 몸짓이 있을 거야 기대하는 것은 더욱 어불성설이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주변에 그런 말들 주워 삼킬만한 사람이 없음이다. 말할 사람이 없는데 막연하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목을 매는 건 좀 우스꽝스럽다.

일찌감치 이런 말들은 이래서 곤란하고 저런 말들은 그래서 어울리지 않는 거야 선을 긋는 것도 현명한 일이다. 쓸데없는 기대감 뒤에 찾아드는 허무함 혹은 그것을 뛰어넘는 비참함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애당초 빌미를 만들지 않는 게 좋다. 막아서고 잘라내고서야 목전에 남는 것들만 다독이고 북돋아 데리고 가는 거. 상처 하나 새기기에도 바튼 몸뚱이를 추스를 수 있는 현명함이다.

촘촘한 체에 걸러지고 남은 말들은 밋밋하고 고리타분할지도 모른다. 키만 껑충 큰 키다리 아저씨처럼 세상 물정도 모르는 말들만 남아 아양을 떨지도 모르겠다. 예쁘게 바라봐야지. 긴 세월 같이 할 도반이니 좋은 것만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다짐의 말도 몇 번이고 되뇌게 될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함정을 가뿐히 뛰어넘으려면 그게 최선일 테지. 세월에 걸맞은 말들만 추려 곁에 두고자 했다.

그렇지만 나는 현명한 사람이 못됐다. 어리석고 우둔한 데다가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들어찬다는 철도 없었다. 귀밑머리 하얗게 세고 이마엔 세월의 훈장 깊게 파였음에도 어쩐지 철부지 어린애 같았다. 그러니 멀리해야지 다짐하며 적어놓은 말들 곁에서 떠나지 못하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맴돌 뿐이다. 너무 강한 부정은 차라리 긍정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듯, 이것만은 절대 안 돼하고 밀쳐놓은 것들은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겼다. '절대 안 돼!'가 아니고 오히려 '너 없으면 안 돼!'로 낯빛을 바꾸고야 만다.

아주 오래된 어느 날엔가 웅얼대던 말들을 끌어다가 일기를 썼다. 자고 일어나면 부끄러워 얼굴 붉히게 되는 말들만 골라 빼곡히 편지를 쓰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어쩌자고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말들은 끊임없이 샘솟았고 가까이 두고자 했던 말들은 까맣게 잊히기 일쑤였다. 건망증이라고 하기엔 그 빈도가 너무 잦았다. 차라리 선택적 치매라고 말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다. 그런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담배 한 개비 피우려고 해도 주섬주섬 목발을 챙겨야만 하는 오늘도 나는 사랑이라던가 키스라던가 하는 말을 우물거리며 목발을 짚는다. 병이다. 그것도 병이 깊어 중증이다. 가슴 가득 떠오르는 말들 초성 중성 종성, 소리에 따라 자음과 모음 가위질을 하고 침침한 눈 비벼가며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했다. 얼기설기 엮인 것들 마침내 입을 모아 하나로 소리 내면 말이 되고 글이 되었다. 그 소리 들으며 흐뭇하게 나는 웃었다. 그래도 우는 것보다야 덜떨어진 웃음이라도 그게 낫지 않을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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