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넘어

by 이봄


폭풍우가 물러난 날 해변은 바다가 토해낸 것들로 가득했다. 뿌리째 뽑힌 미역이 널브러져 있었고, 파도를 이기지 못한 물고기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 밀항을 꿈꾸던 페트병이 강제로 귀국했다. 패잔병이 따로 없었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조각배 하나 고래처럼 누워 코를 골았다. 고단한 밤이 사납게 지나갔고 밤새 허리를 꺾어 바람에 누웠던 것들이 두 다리를 뻗었다. 고래 곁에서 졸던 억새는 종일 잠을 잤다. 자면서도 우둑 우두둑 뼈 맞추는 소리가 났다.

잔뜩 발톱을 세웠던 바람이 모래언덕 뒤에 몸을 숨겼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입술에 침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시치미를 뗐다. 언제 폭풍이 있었냐는 듯 딴청을 부렸다. 먹장구름은 분칠을 덕지덕지 바르고는 하얀 뭉게구름을 흉내내었다. 해변을 가득 채운 패잔병들만 억울했다. 흔적으로 남은 것들은 딱히 하소연할 곳도 없어서 애매한 가슴만 쳤다.

참새 한 마리 찾아와 인사를 했다. 실눈을 떴던 억새가 본체만체 두 눈을 감았다. 두 뺨이 얼얼하게 싸대기를 맞았고, 허옇게 드러낸 송곳니는 몸뚱이를 물어뜯었다. 물에 빠져 죽은 물고기처럼 폭풍에 두들겨 맞은 것들은 퍼렇게 멍울이 들었다. 피하고 달아나던 바다를 온몸에 문신으로 남긴 밤이었다. 바다를 닮은 하늘과 하늘을 닮은 바다가 살랑살랑 장난을 쳤다. 아이처럼 꿈을 꿨다. 퍼렇게 멍든 가슴에 연초록 새 움이 트고, 어떤 날에는 은빛 억새꽃 파도를 넘어 하늘을 날아오르는 꿈을 꿨다. 고단한 잠에 깊은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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