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화

by 이봄


젖었고 또 말랐다. 하얀 접시 가득 들어찬 먹물은 지구의 지표처럼 굳고 쌓여 골짜기로 패였다. 산등성이 높다랗게 고갯마루를 만들고 달 하나 띄워놓고 그립다 적었다. 봄꽃이 피었고 눈보라가 불었다. 그러기를 몇 해 손꼽아 헤아리다 그만두었다. 헤아려 본들 의미 없다 포기하고 말았다.

펼쳐두었던 백지는 또르르 말렸다. 세월에 낡고 풍파에 찢긴 종이는 구멍 뚫린 가슴처럼 바람이 오갔다. 눈치를 보는 일도 없이 마치 제집이라도 되는 듯 담장을 넘고 사립문을 열어젖혔다. 머릿속에 담아둔 생각들 하나씩 불러내어 말 하나씩 짝을 짓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붓을 들어 백지를 채우고 내 꿈은 이렇다 이야기했다. 누구에게 들려주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저 삶에 점 하나 찍는 거였다. 산다는 것에, 그 속에서 꿈틀대는 욕망에 대해, 사랑에 관해 점 하나 찍어 완성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것도 꿈일 터였겠지만.

너는 무엇을 꿈꿨나 차마 묻지도 못하겠다. 봄부터 여름까지 속으로만 움켜쥔 말들이 가득 들어찼을 때 해바라기 초록잎은 녹아내렸다. 녹아 흙에 스미고 덤불에 걸려 바싹 말랐다. 두 계절의 뜨거움이었다. 그렇게 한 허리를 접고 말았다. 접어야만 펼쳐지는 것들은 야속했다.

가슴에 움켜쥐었던 말들 꿈결로 깨어나면 꽃대 하나 한낮의 기적으로 허리를 폈다. 붉어 차라리 뿜어지는 선혈이라도 좋을, 갈래갈래 찢긴 꽃잎에 짙은 속눈썹 닮은 꽃술을 펼쳤다. 촛농처럼 녹아내린 이파리의 움켜쥔 말들이 이거였구나! 다만, 바라보다가 눈물짓는다. 처연하여 숨이 막히고 핏발이 섰다. 너는 끝내 점 하나 이렇듯 먹먹하게 찍어두었구나. 부럽다는 말 만지작대다가 얼굴 붉혔다. 미완의 어떤 놈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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