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이 귀한 계절이었다. 사람의 손을 탄 게 아니라면 대부분 흑백의 낯빛으로 아침을 맞았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하늘만 파란 색조를 자랑했다.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은 그래서 더욱 시선을 끌었고 눈에 뜨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색이 귀한 계절이었다.
여전히 기존의 연인들은 팔짱을 끼고 거리를 활보했지만 새롭게 눈을 맞추며 가슴 설레어하는 남녀는 많지 않았다. 계절을 굳이 표현하자면 겨울은 사랑의 계절은 아니었다. 사랑보다는 오히려 이별에 가까웠다. 뜨겁게 타오르던 사랑이 가을을 정점으로 애틋하다가 겨울이 되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별을 통보했다. 거리를 몰려다니는 바람처럼 각자 골목 저편으로 멀어졌다.
유혹이 사라진 세상은 심심했다. 기계적으로 해가 뜨고 멀뚱멀뚱 달이 떴다. 소란스럽던 참새도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은 어쩌다가 눈이 마주친다고 해도 시선을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애써 달콤한 말들을 손에 쥐어줘도 발그레 얼굴 붉히는 사람은 없었다. 색이 사라졌다는 건 말랑한 가슴도 돌덩이처럼 굳어졌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유혹의 말도, 유치한 몸짓도 모두 사라진 색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목숨이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애달파 떨이로 내어놓는 게 목숨이었다. 너 없다면 산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어! 무릎을 꿇고 사랑을 소원하는 연인은 세상 전부를 상대에게 걸었다. 이해타산을 따질 뇌 마저 뜨거워진 마음에 녹아버렸다. 그게 사랑이었다. 붉은 피가 뜨거웠다. 애틋한 꽃분홍색 얼굴이 꽃으로 피었다. 풋풋한 마음은 봄날의 버들개지 보송보송한 솜털로 보드라웠다. 찬란하였다. 봄날이었고 뜨겁던 여름이었다. 손만 스쳐도 자지러지는 계절에 색은 넘쳐났고 까르르 웃음이 시끄러웠다.
을씨년스러운 하늘 바라보다가 사전을 찾아보았다. 색이 없다는 건 겸연쩍어 부끄럽다고 했다. 본질을 나타내지 못해 보잘것없다고도 했다. 내게 남은 색깔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남은 것이 없다. 바싹 마른 낙엽 하나가 전부구나 해야만 했다. 무채색 하늘이 나와 같았다. 더는 널 유혹할 색 하나 남지 않아 부끄러웠다. 하여, 무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