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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Dec 23. 2023

첫 삽을 뜨듯


첫 삽을 뜨고 초석 하나 놓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천 리 먼 길도 한 걸음, 걸음을 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득하고 아스라해서 엄두도 내지 못하던 것들도 처음 하나부터 담장을 낮추고 빗장을 열게 마련이었다.

지레 집어 먹는 겁이 문제다. 有始有終이라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게 마련이다. 겨울이 시작되면 그 꼬리에는 반드시 끝을 매달고 있었고, 더불어 봄을 꼬드겨 같이 짝으로 움직였다. 크게 숨 한 번 들이마시고는 힘껏 삽자루를 밟는 게 그래서 시작이기도 하고 종지부를 찍는 일이기도 하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이 높다랗게 품을 벌리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혹한이 몰고 온 하늘은 쨍하게 시렸다. 거칠게 바람이 불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뼈대만 앙상한 크레인이 끼익 끼익 소리를 냈다. 크레인의 긴 팔에는 몇 가닥 동아줄이 늘어져있었고, 연신 벽돌 뭉치에다 철근 몇 다발 줄줄이 엮어 들어 올리고 내렸다. 이 겨울에도 굵은 땀방울 맺히도록 종일 종종거렸다. 겨울이 지나고 봄꽃 흐드러질 때쯤이면 결국은  마천루 하나 뚝딱 지을 터였다.

나는

"나는 당신이 좋다"

말 하나 끄적이고서 높다란 크레인에 매달았다. 시린 하늘을 휘휘 돌아 그대 고운 손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방긋 봄꽃처럼 웃는 말은 내 마음이고 가슴에 놓는 초석이었다. 하늘을 비웃고 대지를 깔보는 성채 따위는 꿈꾸지 않는다. 그늘 좋은 나무 한 그루와 옹기종기 어깨 맞대면 그만인 오두막이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몇 번의 계절이 얼굴을 바꾸도록 꽃을 심고 풀을 뽑았다. 정성을 쏟았으니 작다고 초라할 것 없는 오두막 하나와 근사한 바람 곁에 두고서

"난 널 사랑해!"

짧은 말 속삭이면 행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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