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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Dec 26. 2023

두 눈 감고서


굳이 충혈된 눈 애써 부릅 뜰 이유 없었다. 신발끈 힘껏 묶을 이유도 없다. 굽이굽이 길은 멀고 그 끝에 너 있다지만 새벽 찬바람에 부지런 떨지 않았았다.

체온처럼 데워진 이불속에서 떴던 눈 다시 감았다. 한껏 닫혔던 감각을 깨워 스치는 바람이며 파고드는 냄새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기억을 부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봄꽃이 피었고 여름날의 소낙비가 몰려갔다. 가을국화가 어찌나 향기로웠는지 모른다. 소담스럽던 함박눈은 차라리 목화솜 터지듯 따스했다. 살갗을 스치는 것들은 향기롭고 보드라웠다. 바람은 시원했고 내리는 빗소리는 달콤하고 짭조름했다.

너 보고 싶다고 애써 두 눈 뜨지 않았다. 밤새 내린 눈밭에 발자국 하나 겨우 남기고 굳이 더는 걷지 않았다. 찬바람에 맞서 불끈 주먹 쥐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마라. 분명히 길의 끝에 너 살고 있었고, 내 가슴속에 머물러 웃고 있었다. 가슴속에 사는 너와 길의 끝에 머무는 네가 다르지 않았다.

"오늘따라 네가 많이 보고 싶어!"

말했을 때 호호호 웃는 너와 까르르 자지러지는 너의 차이쯤이 있을는지는 모를 일이다.

눈밭에 발자국 하나 찍고서 가만가만 나는 너를 바라보았다. 발그레 얼굴 붉힌 네가 꽃처럼 향기롭게 웃었다. 바라봄이 좋아 나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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