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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언 Jun 12. 2019

주간영장류관찰기 - 피난가방 싸는 여자

그건 바로 나 




상암동 걱정왕인 나는 요즘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전쟁이 나거나 절벽 끝에 있는데 발 밑엔 상어가 헤엄치고 있다거나,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집에 들어오려고 문을 두드리는 꿈을 꾼다. 이젠 꿈 속에서도 아기가 등장해, 함께 도망다니기 시작했다. 본의아니게 나의 꿈 속 피난메이트가 된 우리집 아기. 미안하다 아기야 밤마다 꿈에서 많이 고단하지. 


 그래서 피난가방을 새로 꾸렸다. 아기의 짐을 넣어야 했다. 무려 12년 전 유럽여행, 11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썼던 40리터짜리 등산가방. 맨 아래쪽엔 침낭을 넣고 그 위엔 고어텍스 잠바를 넣었다. 양말과 속옷을 하나씩 챙기고 쵸코바를 잔뜩 넣었다. 물은 1.2리터 정도. 예전에 사둔 재해용 물병(정수기능이 있다!)과 스위스나이프도 넣었다. 항생제와 진통제, 일회용 소독약과 붕대도 잊지 않았다. 아기를 위해선 잘 입지 않는, 물려받은 옷들 중 두툼한 조끼를 넣었다. 기저귀와 가재수건, 담요를 넣고나니 분유가 문제였다. 아기는 서너시간에 한번 분유를 먹어야 한다. 한끼라도 거르게 되면 대성통곡을 하다 탈수증상이 올지도 모른다. 일단 응급용으로 두세번 먹을 양을 멸균봉지에 넣어 가방 깊숙이 넣었다. 가방 윗쪽엔 분유 한 통을 통째로 넣을 수 있는 만큼의 공간을 비운 채였다. 가방을 다 꾸리곤 혼자 시뮬레이션을 했다. 초시계를 켰다. 


 자, 지진이 나서 진동이 느껴진다->아기띠를 꺼내 아기를 들쳐업는다->현관문을 열고 두꺼비집을 내린다(지진이 나면 현관문이 일그러져 탈출에 실패할 수 있으므로)->야상점퍼를 입고 두툼한 양말을 신는다->식탁 위에 나와있던 분유 한 통을 맨 위에 넣는다->가방을 맨다->계단으로 탈출한다


 위의 동작을 일사불란하게 시행하는데 무려 5분이 걸렸다. 아기띠 초보라 일단 아기띠에 아기를 집어넣는 데만 2-3분, 허둥지둥 내 옷을 껴입으니 이미 5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남편 점퍼도 하나 챙길까 하고 붙박이장 문을 열다보니 시간은 더 지체됐다(열었다 고민만 하고 챙기진 않음). 여튼 그렇게 황망하게 아기를 앞에 업고(아기둥절...), 뒤로는 40리터짜리 피난가방을 매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앞집 초딩이 학원을 가려는지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자라나는 초딩에게 걱정왕의 재난재해 시뮬레이션을 보여주고 싶진 않아 황급히 문을 닫고 뒷걸음질쳐 후퇴했다. 문을 닫고 다시 집으로 들어오는데 어깨와 등이 부서질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가방이 너무 무거웠다. 저울에 올라가 무게를 재보니, 아기와 피난가방을 합쳐 11키로가 넘었다. 분유랑 물만 합쳐도 2키로가 넘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시뮬레이션을 통해 얻은 수확은 확실했다. 이 가방을 들고 탈출을 할 순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엔 가방을 새로 꾸려야 할 것 같다. 일단 잠자리에 들기 전엔 40리터짜리 배낭 대신 탄탄하면서도 가볍고 수납이 잘 되는 가방을 하나 주문해야겠다. 그러면 꿈에선 조금 덜 쫓길 수 있을까. 아니 이번엔 꿈에서 무거운 가방 걱정을 잔뜩 하게될지도 모른다. 전쟁이 나거나 지진이 났는데 가방이 무거워 옴짝달싹도 못하고 현관 앞에서 전전긍긍하면 어떡하지.


 그래도 내 피난가방에선 더 이상 줄일 게 없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내 가방엔 언제나,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넣어야 할 것들만 넘쳐난다. 다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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