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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wpw Oct 09. 2019

너랑 나의 컨디션

[단편소설]

(1) 토위에 토를 끼얹나?



"옵...우웨억."



강렬했다. 숙취음료를 만드는 회사 들은 사람의 토사물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술이 아주 확 깬다. 불룩한 배 위로 뜨끈한 부대찌개가 흘러내린다. 부대찌개에 뭘 넣었는지 색이 아주 연했다. 그렇겠지. 술이 아주 많이 들어... 우웨에엑.




년놈이서 잘하는 짓이었다. 하나는 옷 위에 토를 했고 나는 그 애의 뒤통수에 토를 했다. 아, 인생 뭐 있냐. 온갖 비명소리가 술집을 메운다. 아 씨 나도 모르겠다. 토사물이 겹겹이 쌓인다. 그 애는 한 차례 토를 하고 정신을 못 차린 채 남의 토사물을 뒤집어쓴 셈이다. 그 냄새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또 한 번 쏟아낸다. 그 애의 얼굴은 토사물 범벅, 내 배와 허리 아래도 토사물 범벅. 술집 사장님과 주방 아주머니가 나와서는 머리를 붙잡고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어쨌거나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부분이 있다면 온 몸에서 시큼한 냄새를 뿌리며 대로변에 소똥을 푸드덕 싼 것마냥 건대입구 사거리의 번화가 한가운데를 점령했다는 것이다. 점령의 의미는 그 많은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이 비싼 번화가에 우리의 땅을 세웠노라. 번화가를 겨우 비틀대며 벗어났다.



일단 씻을 곳이 필요했다. 이 친구는 인사불성, 나는 반인사 불성, 반인사 불성이 더 안 좋은 이유는 이 시큼한 냄새를 계속 느껴야 하는 점이었다. 나는 숙박업소를 찾다가 길가 하수구나 전봇대 위로 두어 번의 토를 더 했다. 부축하던 그 친구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말이다. 겨우겨우 이리 끌고 저리 부딪히고 하며 숙박업소에 도착했을 때의 꼴을 상상하기도 싫다. 온몸이 토사물로 덕지덕지 붙은 두 남녀. 바닥을 몇 번을 굴렀는지 온갖 음식물 찌꺼기에 때까지 낀.. 으 여기까지 하자. 또 토할 것 같으니까.




숙박업소의 주인은 매우 곤란해하는 눈치였다. 그 꼴을 하고 방을 쓰면 나올 결과가 뻔했기 때문이다. 그 사장님은 이 모텔에서는 세탁기도 없고 도저히 받기 어려울 것 같다며 미간을 꽉 지푸린 채 그나마 토사물이 덜 묻은 내 한쪽 팔을 끌고 저기 길 근처로 가면 여인숙이 있으니 그리 가 보라고 했다. 20대의 나이에 내가 여자애랑, 그것도 아무 관계도 없는 여자애랑 여관방이라니. 그럴 생각을 할 틈이나 있으면 다행이었게. 그 당시 나는 어디든 들어가야 했다. 어디든 들어가서 옷과 함께 그냥 사람도 넣고 세탁하고 싶었다. 너무, 너무, 아. 너무 힘들었다. 글로는 도저히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이걸 어디에 비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여자가 예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예뻤다. 진짜 많이 예쁘고, 몸매도 죽여줬다. 봉긋 잘록 빵빵 뭐 이런 식의 삼박자였다. 키도 컸다. 옷도 섹시하게 잘 입었다. 성격도 좋고 말도 잘하고 머리도 똑똑하고 성격도 드셌다. 그런데, 토사물의 힘은 이런 걸 한 번에 지워준다. 그래 뭐랄까, 스타크래프트로 치자면 히드라가 엄청 많은 저그에게 하이템플러와 리버, 발업 질럿을 끼얹나? 뭐 그런 식이다. 딴 생각은커녕 그냥 너무너무 힘들었다. 아, 글을 쓰면서도 힘들다. 그 기억은 정말 힘든 기억이다.




겨우 여관에 갔는데 여관 아주머니는 아까보다 더했다. 뭐라고 엄청 하시는데 나는 잘 못 알아들어서 그냥 제발 아주머니 저희 저쪽에서 이리 가라고 해서 온 거예요 제발요 돈은 더 내도 되니까 제발요 하고 무릎까지 꿇었다. 무릎을 꿇으려고 그랬다기보단 너무 힘들어서 주저앉았다고 보는 게 더 맞다. 여러분이 경험해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술에 떡이 된 사람이 50킬로 중간의 몸무게를 가지고 있다면 그 느낌은 한 80킬로 정도로 느껴진다. 진짜로. 거기다 토사물까지 뒤집어썼으니 비위까지 상한다. 그걸 거의 몇 블록을 겨우 겨우 끌고 들쳐 매고 부둥켜안고 왔으니 나라고 멀쩡하겠나. 아주머니는 구수하게 불만을 쏟으시면서도 방을 열어주고, 어디선가 까만 비닐봉다리를 가져오셔서는 옷을 빨리 담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몇 번이나,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복도에서 옷 벗어놓고 들어가!!' 하고 소리를 치셨다.





그 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 날 여관방 문 앞에 반쯤 걸쳐져서 우리는 반라가 되었다. 속옷은 그래도 입고 있었지. 내가 그 애의 옷도 벗겼다. 취해서 그랬는지는 세탁 중에 고장 난 건지 모르지만 그 애 치마의 단추? 걸이?를 고장 냈다. 미친 듯이 옷을 벗고 까만 봉다리에 옷을 넣었더니 금세 아주머니가 오셔서 세탁비는 받을 거라고 하고는 봉다리를 가져가셨다. 우리는 겨우겨우 방 문을 닫았다. 아, 구원의 장소라는 게 이런 곳이구나. RPG 게임에서 왜 세이브 포인트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나는 뜨거운 물을 틀어두고 그 애를 질질 끌고 갔다. 그 애는 뭐가 그리 짜증 나고 귀찮은지 자꾸 내 손을 뿌리친다. 아.. 진짜 한대 콱 쥐어박고 싶다. 잘 때가 아니야 이... 후.. 물이 덥혀질 때쯤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고, 나는 그 애를 깨워보려 노력했다. 물이 욕조에 가득 차서 넘칠 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길래 일단 나부터 씻기로 했다. 아직 마르지도 않은 토사물의 잔여물을 헹궈내고 씻자 겨우, 정말 겨우 현세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문을 열기 전까지는.




문을 열었을 때 본 광경은 참혹했다. 그 애는 자기 머리카락을 잠꼬대를 하며 질겅질겅 씹고 있었는데 그 머리카락에는 토사물이.. 아 잠깐 또 올라올 것 같으니 여기까지만 하자. 어쨌든 나는 그 순간 얘를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무슨 짓을 해서든 깨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각팬티 하나만 입고 나는 그 애를 화장실로 끌고 들어와 겨우 안아서 욕조에 넣었다.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속옷 채로 욕조에 넣었지만 별 수 없었다. 머리에 샤워기로 물을 좀 끼얹기 시작하자 그 애는 그엌 풐 엌 하다가 아 씨하고는 몇 번을 고개를 떨구고, 또 떨구고, 아니 이 친구야 이러면 무슨 여기가 남산 대공분실도 아니고 물고문하냐!! 나는 그 애의 머리카락을 잡고 몇 번이나 머리를 꺼냈는지.. 결국 그 애가 잠에서 깼고, 현실을 인식하기 까진 좀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그리고 뭐 그 뒤는 남들 다 하는 식이었다. 비명과, 욕과, 억울함과, 싸움과...




쫓겨나듯 화장실에서 나오고 거의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목소리가 들렸다. 옷을 갖다 달라고 했다. 옷이 없다고 했다. 또 욕을 먹었다. 욱해서 육두문자가 나왔다. 그러자 안에서도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났다.




(2) 고슴도치 같은 여자




기나긴 군 휴학이 끝나고 한 학기를 학비 번다고 이어서 쉬었다가 학교에 오니 나는 이미 시조새가 되어있었다. 새 학기에 처음 만난 아는 얼굴이 동기이자 조교님이라니. 하긴 휴학하기 전이라고 내가 막 마당발에 인기가 높은 학생은 아니었으니 그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나는 복학할 때 꼭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학교에서 독서토론 모임을 해 보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재야의 키보드질로 단련된 나의 능력을 드디어 중원 무림에서 해방시키고 싶었던 욕구가 있었던 것이다. 사파의 무공이 과연 중원에서 어떻게 통할 것인가...! 그 욕구야 말로 수많은 중원 대첩과 무협지의 꿈과 희망, 삶과 죽음, 모험과 액숀을 책임지던 서사시의 핵심 아니었던가! 그러나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는 중원 땅을 밟을 방법이 없었던 셈이다.





물론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나는 휴학한 기간 동안 할 게 없어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책을 읽는 건 돈 없는 사람에게 아주 좋은 취미였다. 서울은 공립도서관들 이용하기가 좋고 대학도서관은 휴학생들에게도 열려있으며 우리 학교의 도서관에서 내가 찾아 읽는 책은 인기도서와는 아주 멀었기 때문이다.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의 '자본'역시 그러했다. 나는 그 외에도 각종 사회문제나 이슈와 관련되어서 읽어볼 만한 사회과학, 철학 개론서를 주로 즐겨 읽었으나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상당히 한정적이라는 점이 너무나 아쉬웠다. 학교에서 이런 책을 같이 읽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국 맨땅에 헤딩하자는 마음으로, 첫 조별 수업 때 나는 조심스레 후배들과 인사를 나누고 혹시 이런 독서모임이 있으면 어떨 거 같냐고 물었다. 반응은 정말 생.각.보.다.긍.정.적.이.었.다. 까마득히 높은 학번의 선배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듯했다. 어쨌거나 나는 그 빈말에 가까운 반응을 덥석 물고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지난 학기 내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일한 덕에 주머니 사정도 괜찮았어서 전략도 단순했다. 막 사줘! 막 먹여! 막 또 사주고, 먹이고, 또 사줘! 술을 넣고 밥을 넣고 커피를 넣고 아이스크림을 넣고 거의 뭐 자판기처럼 맥였다. 그렇게 열명이 넘는 후배들을 모았다. 그중에 걔는 없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모임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이런 모임에 대해 빠삭한 지인으로부터 책을 고르는 데 도움을 받고, 재밌고 쉬운 소설책들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쟁점은 내가 잘 뽑아내서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읽는 게 재밌는 책이 훨씬 모임을 진행하기 좋을 거라는 조언은 그야말로 정확했다. 그렇게 모임이 세 번쯤 굴러가고 슬슬 구성원 사이에서 고정적인 스케줄이 잡힐 무렵 들어온 것이 그 애였다. 소문을 타고 견학 왔다던 아이는 첫인상이 매우 강렬했다. 그도 그럴게 스물 언저리의 학생들이 가죽으로 된 쫙 달라붙은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신고 딱 달라붙는 나시 같은 상의를 입고 새빨간 립스틱을 칠했으니 얼마나 인상 깊었을꼬! 예쁘고 섹시하고를 떠나서 그런 패션을 하고 다니는 아이는 정말 드물었기 때문에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다리를 딱 꼬고 팔짱을 똭 끼고 앉아서 두 시간을 말없이 경청하더니 다음 주부터 자기도 나오겠다고 선언했다. 한 사람이라도 늘어나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는 이런 모임을 해 보신 분들은 다 공감할 것이다. 잘 됐다고, 오늘 끝나고 다 같이 뒤풀이 하는데 같이 가자는 말에 '아뇨, 일 있어서. 담주 일정 카톡으로 주세요.' 하고는 자기 번호를 슥삭 적어 주는 것이다. 와, 장난 아니게 쿨하다. 도시미녀란 말이 딱 어울렸다.





처음에는 그 애가 예쁘고, 똘똘해서 참 좋았는데 (사실 약간 흑심도 생길 뻔했다.) 그런 기대는 와장창 박살이 났다. 그 뒤로는 정말 전쟁 같은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아이는 책을 정말 잘 읽어왔고, 내가 생각하는 쟁점 이외의 것들도 파고들었으며 무엇보다 쟁점의 현실성에 지독히 달려들었다. 사실 그 모임은 나의 지적 허영을 충족시키는 역할도 했던 것이, 내가 어떤 책에서 사회적 이슈나 시사문제와 연관을 시키고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사회과학 이론이나 철학을 이야기하며 주장을 정리하고 교통정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자유로운 토론을 듣고 마지막에 손석희처럼 그런 포지션을 취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다. 아이들의 그 감탄과 신기함이 뒤섞인 눈빛은 정말 짜릿했다. 매번 좋아. 새로워. 질리질 않아. 그러나 그 애는 달랐다. 그 애는 이러한 이야기에 절대 동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령 외모 지상주의에 대해서 '그렇지만 예쁜 애가 좋잖아요? 나도 잘생긴 애가 좋은데.' 좋은 애를 더 좋게 평가하게 되는 게 현실 아닌가요? 그러니까 첫인상이 중요하지. 그렇게 되면 부당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각자의 삶이 너무 힘들어지는 거 아닐까? 외모는 개인의 영역이기도 하고. 그건 맞는데 현실은 안 그렇잖아요.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예쁘고 잘생긴 사람 만나고 싶어 하고 첫인상 좋은 사람한테 더 좋은 평가 주고.. 뭐 이런 식이 었다. 이렇게 짧게 쓰면 마치 어그로를 끄는 애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멤버 중에 책도 가장 열심히 읽고 토론 과정에서의 논리력과 이해력도 정말 뛰어났다. 그저 대부분의 주장과 분석에는 동의하면서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강조하고는 했다. 자본주의가 모순된 체제인 거 동의해요. 노동 가치론도 동의하고요. 그런데 실제 가치가 매겨지는 현실은 그렇지가 않잖아요. 현실을 바꿔야지. 현실은 바꾸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거죠. 내가 바꾼다고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우리라면 바꿀 수 있지. 어떻게 우리가 되는데요? 그게 민주주의 아닐까? 민주주의니까 이런 현실도 안 바뀌는 거죠. 알고 옳다고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잖아요.






점점 모임 내에서 그 아이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모임을 해 오던 아이들 사이에서는 썩 곱지 않은 시선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좌파적이거나, 진보적이거나, 혹은 그보다는 조금 더 러프하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를 주기적으로 토론하고, 쟁점을 교환하는 과정은 약간의 선민의식을 충족시켜준다. 그리고 본인이 좀 더 적절하게 착하거나 도덕적인 자리, 혹은 지식인이 위치할 자리에 있다고 느끼게 하는 효과도 있다. 그런데 이 애는 그걸 쉽게 부수고는 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 모임에 있던 친구들은 그래서 얘를 불편해하고, 짜증 나게 여기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매번 함께 가자던 뒤풀이의 권유에도 나중에는 점점 이 친구가 뒤풀이를 간다고 하면 슬슬 빠지거나 갑자기 일이 생겼다는 식으로 빠져나가는 인원이 많아졌다. 하루는 직접적으로 그 애가 없는 자리에서 뒷담화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가볍게, 지나가는 말투로 에이 그래도 같이 공부하는데 그러지 말자~ 하고 설렁설렁 넘겨왔다. 어쩌면 그 갈등을 외면한 내가 가장 문제였을 테다.





방학의 어느 모임날, 우리는 평소처럼 토론이 끝나고 술자리를 가졌다. 그 애를 가장 불편해하는 아이들 몇 명이 빠진 조촐한 자리였다. 그 애는 언제나처럼 나와 격렬한 말싸움 중이었다. 술이 들어가고 조금 더 과격해지고, 또 들어가고 언성이 높아진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 친구랑 나는 그렇게 이야기해도 괜찮은 사이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그렇게 이야기해도 토론의 룰을 벗어나지 않을 정도의 대화가 가능한 사이. 그러나 그날은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함께 술을 마시던 다른 학우들이 전부 중간에 일어나서 가버린 것이다. 한 친구가 마치 대표자처럼 '아, 작작 좀 해라 진짜.'라는 말을 남기고. 그렇게 나가는 아이들을 가게 밖에서 잡았다. 선배, 솔직히 저희 쟤랑 같이 못하겠어요. 미안해요.라고 말하는 학우들과 그 사이에 서린 눈빛들 앞에서 나는 어떤 말이라도 해야 했다. 설렁거리며 넘어갈 수는 없는 어떤 말을. 알았어, 내가 잘 얘기해서 빼든 지.. 아니면 술을 같이 먹거나 이런 자리 안 만들게. 미안하다. 형이 미안해하실 건 아니에요. 솔직히 저희도.. 쟤 말 잘하고, 똑똑하고, 진짜 공부 열심히 해오고.. 알겠는데.. 너무 막 말을 세게 하고, 긁고. 왜 형이 다 받아주는지도 사실 모르겠고..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들어가서 풀고.. 아뇨, 우리 그렇게 충동적으로 그런 거 아니에요. 미안해요 형. 다음 모임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애들을 보내고 처참한 심정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그 애는 빈 술잔을 두고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어.. 급한 일들이 있나 봐. 그 애는 한참을 무표정으로 있다가 술잔을 내밀었다. 이미 졸아버린 김치찌개 위로 소주를 건넸다. 반잔쯤 따라줬더니 장난해요? 더 줘요. 하고 쏘아댄다. 한잔을 가득 채워주자 그제야 건배도 없이 쭉 들이킨다. 크으.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경제가 결정하고 뭐 이런 이야기였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만하자. 그 애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나는 비겁한 짜증을 부린 것이다. 그 애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자신의 술잔에 또 한 번의 술을 가득 따라 마시고는 아. 잘 마셨다. 가요 선배. 다 드셨죠? 하고 주섬주섬 일어나는 것이었다.





며칠 뒤, 아이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음 주 모임을 예정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 애에 대해서는 형이 적절하게 전해주시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며칠 전의 술자리에서 했던 내 비겁한 짜증에 짓눌려 이 일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모임 날이 도래했다. 어느 때처럼 그 애도, 학우들도 자리에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약간의 수군거림. 그리고 누군가가 입을 열기 직전에 그 애는 먼저 일어섰다. 미안해요. 많이 불편했죠? 오늘은 제가 이제 이 모임 못 나올 거 같아서 인사드리러 온 거예요. 그동안 재밌었고.. 많이 배웠어요. 저 때문에 다들 그러시는 거 같은데.. 안 그러셔도 돼요. 죄송했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내게도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인다. 세미나실을 훌쩍 나가는 그 애를 나도, 아무도 잡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어디선가 잘 됐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민폐였지. 맞아. 좀 심하게 깝쳤..깝쳤다고 하면 좀 글타 히히히 아니 솔직히 맞지 까르르... 그때, 한 학우가 내게 물었다. 쫒아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너희들 의견이 그런데 내가.. 뭐.. 그렇잖아. 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친구는 잠시 이야기를 하자며 날 끌고 나왔다.




"형."


"왜?"


"그래도 이건 아닌 거 같아요."


".. 그렇긴 해도 어쩔 도리가 없잖아. 나중에 내가 따로 연락해서 이야기 잘 마무리.."


"그게 아니라요. 아.. 그러니까..."


"응?"


"솔직히.. 걔가 하는 말이 정말 짜증 나긴 하는데 틀린 말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고... 애들이 저렇게 반응하긴 해도 아.. 막... 뭐라고 해야 하지.."


"아무튼요, 제가 애들이랑은 말해볼게요. 이렇게 나가면 우리가 왕따 시킨 거 같고... 학교 수업 때도 계속 마주칠 텐데.."


"부탁해요 형."




비겁했다. 그렇지만 나도 비겁했다. 나는 건물을 나와 그 애를 찾았다. 벌써 어디까지 간 거야? 전화를 거니 받지를 않는다. 마음이 불편했다. 학교를 한 바퀴 도는데 교내 카페에서 유유히 커피를 쭙쭙 빨며 나오는 걔를 보았다. 야! 어? 모임 안 하고 왜 나오셨어요? 아니 네가 그렇게 나가니까.. 별.. 저 진짜 일 있어서 관두는 거예요. 아니 그걸 누가 믿냐... 선배도 커피 한잔 할래요? 아니 커피가 문제가 아니라.. 한 입 마시라는 식으로 자기가 먹던 카페라테를 눈앞에 휙 건넨다. 나도 모르게 입에 물자, 다 마셔요. 내가 쏘는 거야. 하고 총총 걸어간다. 읍! 하고 커피를 쭉 빨았다가 사례를 들렸다. 정말 지독하게도 달았다. 물엿을 입에 짜 넣어도 이 정도는 아닐 테였다. 야! 하는데 손을 휙휙 흔들고 성큼성큼 사라진다.





그 애에게서 술 한잔 하자고 연락이 온건 이주가 지나서였다. 결국 모임은 그 애 없이 흘러가게 되었고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단 한 가지, 어딘가에서 외면받는 마음 한 켠의 불편함과 허전함만 뺀다면. 나는 애들한테 같이 가자고 말을 해 볼까 하다가, 이번엔 그냥 혼자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둘이서 만나도 괜찮냐는 물음에 흔쾌히 그러자고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술을 마셨다. 정말 이상한 술자리였다. 매번 지독히 논쟁을 벌이다가 막상 별 일 없이 술 한잔 하려니 할 말은 없고 술만 들어간다. 거나하게 취기가 오를 무렵, 그 애는 대뜸 자기가 잘 아는 집이 있다며 2차를 가자고 했다. 여기 안주는 맛이 좀 별루다. 그렇게 우리는 건대까지 아이스크림을 빨며 별 말없이 걸어갔고, 그 애가 잘 안다는 술집에서 2차를 했다. 이번엔 막걸리를 잔뜩 시켰고, 여전히 우리는 별 말이 없었다. 모임은 어때요? 뭐 똑같지. 잘 지내 다들. 하긴. 책은 뭐 읽어요? 그냥 뭐. 아 그 책, 나도 읽어봐야겠다. 요새 수업은 들을만하세요? 늦깎이 복학생이 다 똑같지 뭐. 하긴 아저씨지. 아저씨까진 아니지. 넌 연애 안 하냐? 그러는 선배는요? 나야 뭐.. 근데 뭘 물어봐요. 쓸데없이. 그러냐? 술이나 먹어요. 이런 식이 었다.





그리고는 이 꼴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처음으로 쌍욕을 했고, 나는 정말로 짜증이 났다. 내가 왜 이래야 하지? 모든 게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화장실 문을 사이에 대고 서로 침묵이 흘렀다. 옷 좀 구해다 주면 안돼요? 빨았다니까. 아니 그러니까.. 뭐 어디 가서.. 제가 돈은 주면 되잖아요. 야 이 새벽에 옷을 어디서 사.. 아니 그럼 난 계속 화장실에 있어요? 아 그냥 대충 수건으로 말고 나와! 안 볼 테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뭐가 문제야! 대화는 쳇바퀴를 구르듯이 원점이다. 아니 아.. 씨. 나 남자 앞에서 벗은 적 없다고요! 나는 뭐 그럼 여자 앞에서 맨날 벗은 사람 같냐!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야 내가 너 옷 다 벗기고 거기다 던져놓고 씻기기까지 했거든. 아 진짜! 야 그럼 뭐 어쩌라고 뭐 뭐 내가 뭐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런 거 신경 쓸 만큼 여유 있었을 거 같냐! 아.. 죽고 싶다 진짜.. 누가 할 소릴.. 아 몰라 니 알아서 해. 저기 선배.. 그럼.. 여기 주인집에서 옷 좀 빌려오면 안돼요? 나도 팬티밖에 안 입었어!! 아니 뭐 전화로라도.. 부탁해볼 수 있잖아요. 아 쫌...





주인아주머니께 여관 전화로 내선을 걸자, 아주머니는 구시렁대면서도 반바지와 후줄근한 티셔츠 한 장을 가져다주셨다. 총각 남자 옷은 없어서... 여자 친구만 입히면 되지 뭘. 근데 같이 그냥 벗고 있어도 되는 거 아녀? 아니 그러게 젊은 친구가 여자 친구한테 술을 맥여도 적당히 먹여야지 아무리 젊기로서니 그러는 거 아녀. 아주 그냥.. 어휴.. 콘돔은 챙긴겨? 뭐 이런 이야기를 5분 정도는 들은 것 같다. 빨래는 말려서 줄 테니까 좀 기다려. 내일 점심때는 돼야 혀. 밥은 우짤껴? 지금은 아무 생각이.. 아 그래도 뭘 먹어야지. 거기 서랍에 보면 24시간 배달해주는 집들 있어. 시켜서들 먹어. 아 예.. 내가 우리 집 아들 생각나서 이렇게 해주는 거야! 빨래하고 옷도 빌려주고 뭐 남겠어 남긴? 아이고 그럼요 감사합니다. 알면 깨끗하게 쓰고. 방을 휙 둘러보시고는, 그래도 용케 그 꼴로 어디 안 더럽혔네. 하고는 옷을 남긴 채 나가셨다. 야, 옷 왔어. 진짜요? 그래. 화장실 문틈 사이로 옷을 넣어주었다. 이내 힙합패션이 된 그 애가 물에 젖은 생쥐꼴로 나왔다. 팬티만 입고 있던 나는 나온다고 얘길 해야지! 하며 화를 냈다. 나는 뭐 보고 싶어서 보는 줄 알아요? 이불이라도 두르시든지.. 어이가 없었다.




아, 속 쓰려. 뭐 먹을 거 없어요?


너는 그러고도 뭐가 더 먹고 싶냐?



여관 냉장고를 여니 생수와 맥주가 있었다. 뭐라고 하기도 전에 캔맥주를 따서 입에 가져간다.


야! 너 술 그만 먹어 미쳤네 진짜


아 술은 해장술인 거 모르세요 아마추어같이..



그렇게 기어코 캔맥주를 비우고는, 앉아요. 하고 말한다.


아 안 볼게요. 이불 진짜 열심히 두르셨네.


내가 쪽팔려서 그래 내가.


오빠도 볼 거 다 봤다면서요.


야 아주 토가 범벅인 것밖에 기억이 안 나.


아 진짜!



아까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분위기였다. 역시나 별 할 말도 없어서 나는 생수만 쭉쭉 빨고 있었다. 그 애는 헐렁한 반바지를 입은 채 무릎을 모으고 그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세상에서 얘한테 가장 안 어울리는 자세였다.




오빠


? 미쳤니?


... 미워하지 마요. 나.




(3) 품 안에 따가운 가시들







"안 미워해."


".. 거짓말."


"그래 밉다."


"나빴어.."


"야 지금 나는 전지현이 이랬어도 미워할 거거든?"


"... 내가 전지현보다 더 영계잖아요."


"얼굴 몸매 다 빼면 그렇지."


".... XX."


"너 지금 욕했지?"




별 의미 없는 대화가 짤막하게 이어지는 동안 긴장이 풀렸는지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좀 자도 되겠지? 아.. 지친다. 머리가 욱신거리는 게 슬슬 술이 깨는 것 같았다. 이 애의 이름은 민희였다. 민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나 졸립다. 너도 좀 자.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나는 그리고는 방구석으로 이불을 끌어매고 걸어갔다. 맨바닥이 등에 배기는 듯했지만 지금은 아스팔트 바닥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싶었다.



"자지 마요."


"왜.. 졸려."


"난 안 졸려요."


"그거야 완전 꼴아서 내가 들쳐 매고 왔으니 그렇겠지."


"... 아 씨.. 진짜."


"너 점점 말이 막나 온다?"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후배랑 한 방에 있는데 잠이 와요?"


"그렇게 예쁘고 섹시하신 분 볼 거 다 봤더니 잠이 옵니다~. 야 그만해 나 진짜 자야겠어."


"....."



갑자기 민희의 말이 끊기자, 약간은 말이 심했나 싶었다. 에라이. 만사가 귀찮았다. 눈을 딱 감고 셋만 세면 잠이 들 것 같았다. 하나. 두울.. 세....




딱!




"아!!!"




뒤통수에 강렬하게 꽂힌 것은 여관방의 리모컨이었다. 아. 화가 났다. 대체 얘는 왜 이러는 거지? 토론할 때 드세게 나오고 직설적으로 말하고 그러는 건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유독 지금 이 상황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울컥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해 팬티바람으로 이불을 확 젖히고 성큼성큼 민희에게 다가갔다. 약간은 노려보는 듯, 약간은 애처로운 듯한 눈과 마주쳤다. 아랑곳없이, 나는 민희의 어깻죽지를 콱 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다.



"꺄악!"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민희는 평소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온몸을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때리거나 할 심산은 없었다. 그냥 어깨나 팔 정도를 잡고 내가 진짜 힘들다는 걸 이야기하려고 했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면 이해할 만한 애였으니까. 그런데 반응이 너무 이상했다. 가까이 다가가 팔을 올린 정도로 이렇게 무서워하다니. 겁이 났다.



"야, 왜.. 왜 그래?"



슬그머니 손을 내려 팔을 살짝 건들자, 민희는 더 붙을 곳도 없는 서랍장에 깊숙이 몸을 밀며 고개를 숙이고 바들바들 떨었다.



"야, 놀.. 놀리지 마. 왜 그러는데?"



대답 없이 떨기만 하는 민희를 두고,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미안해. 난 그냥.. 너무 피곤했어.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널 때리기라도 했겠니?.... 진짜 잘게. 너도 좀 쉬어.



돌아서서 자리에 누웠지만 기분이 어수선했다. 하긴, 나는 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나머지 이 공간과 상황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건들지 말아야 할 선을 비겁하게 이용한 느낌이었다. 눈을 감아도 이런저런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헤집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민희가 입을 열었다.



"... 미안해할 거 없어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민희는 이 쪽은 보지도 않고 고개를 파묻은 채 독백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알아요. 나도 내 성격 개차반인 거. 나도 원래부터 이렇지는 않았어요..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남한테 아쉬운 말 한마디 못해서 끙끙 앓고.. 언제나 손해보고 살아도 다 괜찮다고 하고.. 나 진짜 착했어요. 못 믿겠죠?"



말이 멈추고, 민희의 고개가 슬쩍 올라간다. 나는 왠지 깨어있다는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아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자요?"



".........."



숨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약간 긴장되기도 했다. 민희는 잠깐의 침묵 후,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그때 처음 남자 친구가 생겼죠. 왜, 그 학교에서 잘 논다는 일진애들.. 그중에서도 제일 잘 나가는 애. 그런 애의 여자 친구가 되었어요. 그때는 그게 뭐라도 된 줄 알았죠. 맨날 착하게만 살았었는데 갑자기 애들이 대하는 게 달라지고.."



"........."



"세상에 공짜는 없더라고요. 나는 그 애를 진짜로 좋아했었나.. 기억이 잘 안 나요. 기억나는 건... 반쯤 강제로 했던 첫 섹스?"



"..............."



"내가 별 얘길 다한다 진짜. 사실 그건 별 일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 뒤가 문제였지. 하루는 걔랑 친한 선배를 데려왔어요. 왜 있잖아요. 고등학교도 안 다니는 무서운..."



"그 뒤로는 뭐.. 뻔하죠. 일진 여자 친구라는 게.. 하하."



훨씬 더 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자고 있지 않았던 게 들킬까 일부러 이까지 갈았다. 빨리 잠들어야겠다는 생각과, 민희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함께 소용돌이쳤다. 민희는 냉장고를 또 여는 듯했다. 딸깍, 캔 맥주 뚜껑을 따는 소리였다. 꿀꺽이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저 고등학교 중퇴예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검정고시 보고.. 수능 보고.. 애들 고등학교 다닐 때는 거의 집에만 있었어요. 학원도 제대로 못 다녀보고. 무섭더라고요. 그 선배랑도 자고, 또 다른 선배랑도 자야 하고. 싫다고 하면 맞고. 그리고 또 좋아한다고 비는 걔 앞에서, 니 덕분에 나도 잘 나간다고 신나 하는 걔 옆에서. 몇 달 그랬더니 소문이 다 나더라고요. 그리고 걔 옆에는 또 그럴싸한 여자애들이 생기고. 다 그런 식이죠 뭐. 나중에는 엄마 아빠한테까지 말이 들어갔는데..."



"..............."



"아........ 말하기 힘들다. 나 이거 진짜 살면서 처음 입밖에 내보는 거예요. 쉼터 선생님한테도 말한 적 없었는데. 우리 엄마 아빠랑은 벌써 안 본 지 몇 년 넘었어요."



가슴이 꽉 막혔다. 얼굴이 시뻘겋게 타오르는 듯했다. 이게 화인지, 슬픔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엄마 아빠는 날 도와주려고 했어요. 알아요. 근데 우리는 다 서툴렀어요. 엄마 아빠는 화가 많이 났을 거예요. 나는.. 그냥. 모든 게 싫었어요. 살기도 싫었고.. 바보같이 착하게 살았던 게 너무..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맨날 솔직해라, 친절해라. 나 그렇게 살았는데."



목이 멘다. 민희의 목소리에 물기가 맺힌다.



"이런 성격이 된 게 꼭 그 탓이라고 하면.. 아. 무슨 전형적인 비참한 여학생.. 소설 같은데 나오는..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하긴 싫어요."



한 숨이 깊게 여관방 바닥으로 퍼진다.



"그냥.. 돈도 벌어야 했고요. 공부도 해야 했고. 쉼터에서 계속 살기도 싫었고.. 부모님이랑도 멀어지고 싶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뭐. 친구도 없고, 세상엔 온통 적이고. 더 이상 당하고는 못살겠어서. 그렇게 됐어요."



"진짜.. 선배한테 말하는 게 처음이니까..."



훌쩍임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진다.



"..... 미움받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내 성격 끝까지 포기 안 하고 있어 준 사람은 선배가 처음이었는데.."



"....... 선배가 만든 모임을 망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잘해보려고 했어요. 근데 자꾸, 자꾸....."



서글픈 웃음소리가 짧게 흐트러진다.



"후훗.. 나 못생긴 사람 안 좋아하는데. 내가 진짜 오늘 정신 놨나 봐요. 자는 사람 앞에 두고 별소릴 다해보네. 아, 나 왜 이러지?"




그냥



아.. 모르겠다.



둑이 터져버린 듯이 남은 이야기가 쏟아진다.



싫었어요. 애들이 전부 선배를 좋게 생각하고, 선배는 애들한테 좋은 사람이고. 나는 그 분위기가 싫었어요. 나한테는 없단 말이에요. 나한테는 그런 친구도, 후배도, 선배도.. 그거 알아요? 애들이 내 욕 엄청해요. 나는 특별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남자애들한테 꼬리 친 적도 없는데. 서울로 대학에 오면, 그러면 나도 평범하게 즐겁게.. 어디에나 있는 여대생처럼 그렇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내가 문제였죠. 난 가시 돋친 사람이었으니까. 알아요. 근데 내가 어떻게 고쳐보려고 하기 전에 이미 다들 여러 번 찔렸나 봐요. 미움을 받으면, 그걸로 끝이더라고요.




그래서 이 모임이 더 욕심이 났나 봐요. 애들 다 너무 착하잖아요. 나 그런 애인 거 알면서 구김 없이 받아주고. 진짜 몇 달 동안 내치지 않고 노력해주고. 근데 내가.. 내가 못 그랬어요. 그래서 더 화가 나고. 선배한테 미안하고. 아. 나 진짜 더럽게 못났다.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술 먹자고 한 거예요.


이제 나랑은 술 안 마시겠죠?


그래도 나 정도면 겉보기는 괜찮잖아요. 그냥 그걸로 넘어가 주면 안 되나?


많이 귀찮아도.. 그냥.. 선배 착하잖아요. 엄청 착하고, 차분하고. 남들 배려 잘하고, 또.. 그냥.


아 씨. 이게 뭐야. 쪽팔리게..


몰라요. 미워하지 마. 싫어..




캔맥주가 비었는지, 중간중간 들리던 목 축이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고 깊은 흐느낌만이 들리는 듯 마는 듯 스러진다. 나는 어느새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훌쩍, 하고 코도 먹었다. 크흥 하는 소리가 울린다. 흐느낌이 멈춘다.




"........... 깨있었어요?"




.............................. 아, 이런 젠장.




(4) 해가 중천에도 우리의 밤은







............. 크어컼 크헝




나는 혼신의 다한 연기로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다. 눈을 질끈 감고 잠꼬대를 하듯.. 코도 골고 이도 갈고 아주 그럴싸한 모양새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애에게는 그러거나 말거나였나 보다. 냉장고의 차가운 맥주를 꺼내어 볼에 갖다 댄다. 깜짝 놀라서 어깨가 움찔했다. 다 틀렸다.




"크흨...으.."




마지막 발버둥으로 잠에서 막 깬듯한 포즈를 취하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에는 처량한 표정으로 망울진 눈을 한 민희가 있다. 민망함과 속상함이 배를 훑듯이, 눈을 마주치면 거짓은 이내 그 힘을 다한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맥주캔을 받아 든다. 한숨을 푹 쉬며 일어났다. 민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맥주는 따지 않은 채다. 다만 우리의 냉장고에는 이제 더 이상의 맥주는 없었는지, 민희는 빈 손을 아쉬워한다.




나는 대화의 요령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몰랐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평소에는 말을 잘한다는 소리를 으레 들었지만 그건 이를테면 형식이 있는 말들이었다. 감정이나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나 의견에 대한 일들 말이다. 그래서 내게 이 침묵 동안 주어진 선택지는 정말 많으면서도 거의 없는 셈이었다. 요령껏 위로를 할 수도 없고 요령껏 못 들은 체할 수도 없다. 다만 눈 마주침이 더 길어지기 전에 맥주를 따서, 한 모금을 꿀떡 마시고 민희에게 넘긴다. 민희는 맥주캔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한번 쓱 훑고 꿀떡이며 또 한 모금을 마신다. 350 미리의 맥주는 그러고도 남아서 내게 돌아온다. 나는 다시 한 모금을, 아니 두 모금 정도를 마신다. 민희는 아 남겨요. 하고 그제야 입을 연다. 딱 한 모금쯤 남은 맥주를 돌려주자, 이번엔 입을 대지 않고 마신다. "아 왜 간접키스해요~"





어이가 없다.





마치 그 대화가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맥주 한 캔을 다 비운 뒤에 너나 할 것 없이 다시 누웠다. 나는 마음이 심란해서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명확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랬다. 우리는 다만 장님이 된 것처럼 손을 더듬어 서로를 생각해 볼 뿐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인간은 코끼리처럼 커다란데도, 코끼리의 발을 겨우 만져대며 그게 인간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던 구절이 이어서 떠올랐다. 나는,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소경이 되어 민희의 코끼리 같은 발을 더듬어 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그렇게 밖에는 서로를 지탱할 수가 없는 게 아닐까 하여 그게 잘못한 건 아닐 거야. 민희의 코끼리 발은 다만 투박하고, 거칠고, 예쁘고 맨질맨질하게 손질할 수는 없었던 것뿐이었다고 그건 그냥, 불운에 가까운 것이라고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마치 나와, 민희를 만나며 살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면죄부가 되는 듯했다. 우리는 소경이 아니었음에도 소경처럼 산 것은 아닐까 하고. 다만 그러했다.




"아직 안자죠?"




민희의 입이 떨어졌다. 나는,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작게 어. 하고 대답했다. 민희는, 옷자락과 이부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신기하게도 아까와는 다르게 긴장이 되지 않았다. 민희는 돌아 누운 내게 등을 맞대어 누웠다. "아까 봤죠? 돌아서서 건들기만 해 봐.." 나는 웃음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마치 민희를 처음 본 날 같이 느껴졌다. 예쁘고, 여자다워서 긴장하게 되는 그런 이성. 하지만 농담으로도 그 상황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웠기에 다만 "잘 거야"라고 답했다. 민희는, 아 자지는 말고요. 난 잠 안 오는데.. 하고 말한다. 어쩐지 계속 휘둘리는 느낌이다.




"...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면 안돼요."



".. 알아."



"아 진짜. 진심."



"... 알았다니까."



"확실해요?"



"믿어라 쫌..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디?"



"... 너무 자신 있어하니까 갑자기 의심이 드네요."



"... 뭐 인마?"



"농담이에요. 그럴 사람이면 이렇게 있지도 않았겠지."




맞닿은 등은 약간 차가웠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서히 따뜻해진다. 파르르, 하고 서로의 몸이 교대로 떨린다. 아마 약간의 차가움이 약간의 따스함으로 변하면서 그렇게 되었나 보다. 누구 할 것 없이 쿡, 하고 웃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까맸던 바깥이 푸르스름해질 무렵에도 우리는 잠들지 못한 채 서로의 등에 의지해 있었다. 숨소리가 조금씩 차분해지고, 민희는 손 좀 잡아줄래요? 하고. 나는 말없이 손을 잡았다. 얼음장 같은 손이었다. 아무리 손을 쥐고 있어도 이래서.. 미안해요. 아냐. 선배는 손이 뜨거운 편이네요. 남자들이 그렇지 뭐. 아닌데. 유독 뜨거운 거 같아. 술 먹어서 그래. 심박수가 약간 올라간 듯한 게 등 뒤로 전해질까 겁이 났다. 아까부터, 민희의 맥박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듯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으려고 애를 쓴 건 알량한 선배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깍지를 끼지 않은 손이 덥혀지고, 민희는 이제 됐다며 손을 놓았다. 오빠. 너 왜 자꾸 선배랬다 오빠랬다 그러냐. 어느 쪽이 좋아요? 어느 쪽이든 통일시키는 게 좋은데. 싫은데요. 우리 한잔 더해요. 뭐? 잠도 안 오고, 옷도 아직 없고. 냉장고에 맥주 다 떨어지지 않았어? 시켜먹음 되죠. 아침에? 원래 야식집은 아침에 시켜먹는 거래요. 그럼 야식집이 아니지 않나? 어쨌든. 쏘주 한잔 더? 너 오늘 수업 없냐? 먹다 가면 되죠. 오빤요? 나도 뭐.. 콜! 야식은 내가 쏜다. 아 속쓰려. 속쓰린데 술생각이 나냐? 원래 속쓰린건 좋은 안주 먹으면서 해장술 하는거에요. 대체 어디서 배운 음주습관이냐.




민희는 여관방 한 켠에 놓인 전단지 뭉치를 들고 전화를 건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이불로 몸을 가렸다. 벽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져서, 다시 등을 맞대고 싶었다. 전화를 마치고 우리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했다. 술이 세다든가, 토해서 배가 고프다든가, 알바 하기 싫다든가. 자취하는데 돈 깨지는거 진짜 토나온다든가. 장학금을 타는거 점점 힘들다든가. 하는 이야기들. 대체로 민희가 이야기를 했다. 나는 민희가 장학금을 탄다는 말을 했을때 놀랐다. 사람의 저력은 진짜 알 수 없는거구나. 열심히 살자고 반성하게된다. 등이 자꾸 차가운 탓에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추워요? 아니 벽이 좀 차가워서. 등을 떼고 이불을 뒤까지 둘러서 기대보았더니 훨씬 나았다. 민희는 뭔가 말하려듯 입을 열다가. 말았다. 그 뒤로는 무한도전이 어땠다는 둥, 지난 주 일박 이일이 어땠냐는 둥의 이야기로 넘어가서 아이유가 뭐가 이쁜지 모르겠다거나, 수지가 뭐가 이쁜지 모르겠다거나, 엑소는 대체 정체성을 모르겠다고 하고 욕을 먹거나 하는 말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아침부터 먹는 족발은 의외로, 정말 의외로 각별하게 맛있었고, 나는 모닝소주가 진짜 달고 진짜 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술자리는 소주 두 병도 까기 전에 끝났던 것 같다. 정확히는 아, 배불러 죽겠다. 저도요. 하고 한 쪽에 음식과 술병을 치워둔 채 벌러덩 누워서,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 꼴을 보고는 못났다고 키득대다가, 정신 없이 어질어질해서 그렇게 옹알이를 하며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이불 하나 없이 서로 엉켜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내 다리는 걔 위에 올라가있고, 걔 얼굴은 내 배를 들이받아있고. 그렇게 우린 여관방에서 무려 이틀을 동침했다. 입구에는 잘 개어진 옷이 놓여있었다. 여관을 나설 때 아주머니는 세상 한심한 놈들을 다 보겠다는 눈빛과, 젊은 사람들이 어이구.. 하는 한탄을 하셨고, 우린 뽀송뽀송하게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옷 위로 술냄새를 약간 흘리며 여관을 나섰다.




아, 오늘 수업 다 날렸네.



오빠.



왜?



돈 있어요?



지갑을 열자 만원짜리가 딱 두장 있었다.



저 만원만요.



이젠 삥도 뜯냐.




민희는 기어코 만원을 받았다. 그리고는 근처 편의점으로 날 끌고 가서 컨디션 두 병을 샀다. 건배! 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웃는 민희에게 야 너 못생겼다. 하고 장난을 쳤다가 배를 맞았다. 삥도 뜯고 사람도 때리고 깡패냐 깡패? 눈을 흘기는 모습도 괜찮은걸. 하고 보니 새삼 민희가 입고있던 속옷과, 살색과, 그 이틀의 밤이 떠올라서 귀가 뜨거워졌다. 술에 취해 서로를 끌어안고 자다 먼저 깼을 때, 술 냄새보다도 좋았던 것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향기로웠던 민희였다.




우리는 그렇게 남들이 술 먹으러 나오는 시간에 술을 깨려고 컨디션을 마셨고, 나는 민희를 컨디션이라고 저장한 뒤에 놀리듯 핸드폰을 보여줬다. 헐. 민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기 핸드폰을 막 두들기더니 변태라고 쓰여진 내 전화번호를 보여줬다. 야, 내가 왜 변태야! 아무짓도 안했잖아! 아무짓도 안했으니까 변태지! 그건 또 무슨 개.. 이봐이봐 입 험한거 봐 진짜 애들이 선배 본성을 알아야해! 내가 집에가기 위해 타는 지하철 역에 도착할 때까지 민희는 시시껄렁한 핑계로 날 계속 놀렸다. 이 애는 갈피를 잡을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없이 슬프고, 가련하다가도, 때로는 너무 강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또 이렇게 유쾌하고 밝다는게 신기하고, 또. 대단했고, 그래서 자꾸 떨리려고 했다. 뭔가 해주고 싶다고. 자꾸. 다만 너무 멀리 온 듯한 느낌에 겁을 집어먹어 나는 에이. 에이, 하고 스스로를 손가락질 하는 것이었다.




간다.



지하철 개찰구로 들어가려자, 민희는



바래다 달라고 하면 바래다 줄 수도 있는데?



하고 배시시 웃었다. 입꼬리가 약간 떨리는 듯 했다. 나는



가슴을 한대 쿵 맞은 듯 했고, 마치 역 안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 애만 포커스에 잡힌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내가 지금 얘를 더 보고 싶은거구나.



에이, 너 왜그러냐.



하고 습관처럼 자신을 타일렀지만 몸은 개찰구에 뭐라도 걸린듯이 멈칫했다. 어떡하지, 하는데 민희의 팔짱 낀 손 끝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나도모르게 손을 잡아달라는 식으로 뒤 돌아 팔을 쭉 뻗었다. 그리고 민희는, 정말 그녀답게 손을 잡아주지는 않고 '갑시다!' 하고는 옆 개찰구로 성큼성큼 슥 들어와 버리는 것이었다.




나쁜년 같으니.




우리의 길었던 밤이 끝나가고 있다.




(5) 라면이나 먹으러 오든가



덜컹거리는 지하철에는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자리가 없었다. 우리는 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집까지는 일곱 정거장, 대충 20분쯤이다. 좋은듯, 귀찮은듯. 그랬다. 민희랑 같이 가니 좋기는 좋은데, 이제 어쩌지 라는 생각은 귀찮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탁 쳤다.



아!



민희는 손을 부여잡고 날 째려본다



"배 두번 만졌다간 아주 손모가지가 날아가겠네요."



"아..아니 딴생각하다가... 놀라가지고.."



"그럼 한번 더 만져봐야지"





"아 이게!"



"남자 배가 이렇게 푹신푹신해서야.."



"너 성추행이야."



"헐.. 설마 지금 불쾌하고 수치스러운거에요?"



"그..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그럼 오빠도 만지든가."



하고는 배를 쭉 내민다.



"..여자애들은 배 만지는 거 싫어하지 않냐?"



침을 꼴깍 삼키는 게 들켰을까 싶다.



"나는 몸매에 자신있으니까~"



단 몇 초 동안 손을 움찔움찔 하던찰나


"시간 땡!"


한다.



나쁜년.. 오늘 두 번째 되뇌인다.



심심한데 얘기좀 해봐요.


무슨 얘기?


이틀 동안 내 얘기만 신나게 했으니 이제 선배 얘길 좀 들어봐야지. 썰 풀어봐요 빨리.


그런거 없어.


아 빼지 말고요 혼자 아는게 어딨어~


없다니까.


헐 혹시 모쏠?


야 모쏠 아니야 근데 진짜 별게 없어


모쏠 맞네 키스도 못해본거?


야 키스 해봤거든 진짜 졸라 많이 해봤거든


하며 눈동자가 왼쪽 위로 올라갔던건 아닌지 신경쓰인다.


맞구만 어쩐지 그러니까 그렇게 긴장했구나?


앙큼한 얼굴로 새초롬한 웃음을 띤 채 끊임없이 놀리는 민희. 속이 끓으면서도 간질하면서도 약도 오르면서도. 야 그러는 넌 비명까지 지르더만?


하고는 약간 지뢰를 밟았나 싶었으나 이내 민희는 내가 언제 그랬냐며 약간은 수줍게 난 모르오 라는 얼굴이다. 당돌하다.


아 진짜 얘기해주면 안되요? 궁금한데!




지하철에서 내리고서도 민희는 끝까지 떼를 쓴다. 야, 그런 얘기를 밖에서 이러고 하는 것도 좀.. 그럼 어디 들어가면 되지! 차나 한 잔? 너 차도 마실줄 아냐? 나 커피 좋아하는데요! 난 술 말고는 안마시는 줄 알았지. 팔꿈치를 꼬집 한다. 아얏.



내가 사는 동네는 지하철 역 근처에 별 게 없는 주택가였다. 너 일찍 안들어가도 되냐? 이미 이틀을 밖에서 보내는데 하루 쯤이야. 그럼 우리 집에 들리던가. 집 가까워. 하고 생각없이 걸음을 옮기려다 아차. 하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민희는 오묘한 표정으로 약간 뜸을 들이더니, 집에 커피 있어요? 하고 묻는다. 아..어..다 떨어졌나? 나는 말을 주워담지도, 그러나 다시 뱉지도 못하고 굼뜨다. 민희는 그럼 어디가서 사야겠네. 하고 두리번댄다.



"어디 편의점 같은거 없어요?"



"아..어.. 쫌 걸으면 있어 저쪽 코너 돌면 집인데 그 근처에.."



먼저 걸음을 내딛는건 민희다. 나는 약간 뒤를 쫄래쫄래 걸어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는 무슨 어떡하지. 이미 상상의 나래는 킬리만자로다. 만화라면 코피라도 뿜을 것 같았지만 진정한다. 망상은 자유니까! 하면서도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자꾸든다. 민희는 코너에서 이쪽? 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묻는다. 민희의 물음과 함께 집도 보인다. 그제서야 덜컥 겁이 났다. 아, 근데 편의점 커피보다는 전문점 커피가 낫지않나? 하고 힘겹게 입을 뗀다. 민희는 꺼벙한 표정이 된다.



"그럼 전문점은 어디있는데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본다. 커피전문점이 어딨더라. 아 씨..



"그.. 다시 반대로 돌아가면.."



되는대로 말을 던지고, 민희는 아 됐어요 그냥 편의점 커피나 먹어. 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아이고...



짤랑.



민희가 커피를 고르러 간 사이, 나는 자꾸 매대 한 켠이 신경쓰인다. 어떡하지. 없는데. 아.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상시 지갑에 두개씩은 넣어둬라. 그리고 또 다른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얘가 잘도 그걸 쓰겠다 유통기한 지날일 있냐. 그러나 친구 하나는 외국에서 자기가 쓰려고 가져온 거라며 두개를 꼭 내 지갑 깊숙이 넣어준다. 예상대로, 유통기한이 지나서 쓰레기통으로 갔지만. 매대를 골똘히 보는데 민희가 갑자기 귀를 콱 땡긴다.



"아!!! 야!!! 뭐하는거야!!"



"빨리 안올래요!!"



얼얼한 귀를 만지면서 편의점 밖으로 나간다. 민희는 편의점 앞에 쌓인 의자를 들더니 바닥에 내려놓고는, 여기서 잠깐 앉아있어도 되냐고 점원에게 묻는다. 우리는 편의점 앞에서 각자의 커피를 뜯는다. 아직도 귀가 얼얼했다.



"오빠 진짜 그렇게 안봤는데..."



서슬퍼런 눈이 내게 꽂힌다. 나는 등에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기분이다.



"나 이거 다 마시면 갈꺼야."



민희는 단숨에 커피를 벌컥인다.



단두대에 선 기분으로, 입을 연다.



"그.. 처음에 좋아했던 친구는..."



민희는 커피를 마시다가 쿨럭, 하고 사례에 걸렸다. 괜찮냐는 말에 손사래를 치면서 몇 번의 기침을 더 하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본다.



"지금 타이밍에...?"



"아깐 해달라며.."



빵 터지는 민희. 덩달아 나도 웃음이 터진다. 숨 쉬기가 힘들만큼 서로를 보고 웃는다. 아, 오빠 진짜 엉뚱하다. 너는 뭐 안그런줄 아냐. 흐윽. 아 숨쉬기 힘들어. 낄낄. 하고 또 잠깐의 웃음보가 터진다.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서야 서로 씰룩대는 얼굴을 각자의 손으로 주무르며 간신히 웃음을 넘긴다.



"됐어요. 남 연애사를 알아서 뭐하겠어. 아깐 그냥 어색하니까 그랬던거지."



하고 다시 커피를 마신다. 나는 그런가. 하고 같이 커피를 마신다.



"역까지 바래다줄께."



커피를 쓰레기통에 넣고 일어선다. 역까지만요? 그럼 집까지 데려다주냐? 당연하죠. ...여긴 왜온거야? 양심이 있으면 데려다 줘야지. 야 내가 양심이 없을 이유가.. 아까 편의점. ...가자.




그렇게 또 한번 지하철 역으로 갔다. 뭐가 그리 웃긴지 민희는 나를 보고 자꾸 피식 피식한다. 또 배 찌르기만 해봐. 민희가 손가락을 두개 탁 세우더니 찌르려는 시늉이다. 중국 권법가가 된 것처럼 홋홋홋 하고 인적 뜸한 지하철 역사에서 웃긴 자세로 한쪽은 당랑권의 고수마냥 콕콕 찌르고 한 쪽은 엽문에 빙의해서 핫챠챠 하다 이내 뱅뱅 도망다닌다. 지하철이 올 때 즈음엔 이미 숨이 가쁜 저질체력들이다.



아하하.



민희는 숨을 가쁘게 쉬면서도 마냥 즐겁다.



문이 열립니다.


민희는 먼저 지하철을 탄다. 따라 타려는데 민희가 갑자기 콱 하고 밀친다. 어이쿠, 하며 뒤로 물러난다.


야 뭐야


장난이지 뭘 진짜 따라오려고. 응큼하긴!


그런거 아니거든!


긔뤈궈 와뉘궈든~



하고 요상한 표정으로 말을 따라하며 이죽대더니, 문이 닫힙니다. 하고 문이 닫혀간다. 민희는 그 사이로, 다음에 라면이나 먹으러 오든가! 하며 손을 휙휙 흔든다. 하, 요망한 년.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필로그>



아, 진짜.


왜 또.


그 새끼 진짜 어이없다니까요.


너는 왜 남친이랑 싸우면 나한테 와서 이러냐?


째릿, 하고 눈을 흘긴다.


이게 다 오빠 책임이지!


내가 뭘!!


억울하기 그지 없다.


여자는 뭐라고 입을 벙긋대다가


술이나 먹어요


하고 입에 소주를 탁, 털어넣는다.


짠도 안하냐.


내가 뭐가좋아서 오빠랑 짠을해.


야 씨 나 갈래.


아 쫌!


너 또 깨졌냐?


고개를 끄덕인다.


에휴.


반쯤 든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인다.


오빤 뭐 없어요?


없어.


설마 아직도..


개소리 집어쳐.


입이 댓발 튀어나온다.


야, 너 몇 년 새 왜이리 못생겨졌냐?


치킨 뼈가 이마로 날아온다.


미쳤냐!


미쳤다!



저기요. 조용히 좀 해 주세요.



뒷좌석의 말에 우리는 치킨뼈와 숟가락을 놓고 얌전해진다.


죄송합니다..


탁자 밑에서는 두 발이 현란하게, 홍금보와 이연걸처럼 투닥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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