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선후배/젊음] 을 소재로 한 짤막 글
"네?"
소주잔을 채우다 말고 벙 찐 표정으로 되묻는다. 이 아가씨가 뭐라는 거지? 눈 앞에 있는 누나는 단발머리가 찌개에 젖을 듯 말 듯 하게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기울어 있었다. 누나 잔에 한잔 주고 내 잔에 한잔 따르는 그 사이에 내가 꿈이라도 꾼 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누나를 보며 멈칫한 손으로 다시 술을 따른다. 쪼르르르, 잔이 꽉 차고 병을 내려놓자 그녀는 단발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든다.
"건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씨익 웃으며 앞에 놓인 잔을 번쩍 든다. 너무 빠르게 마시는 것 같아서 그녀에게 좀 천천히 마시라고 했지만 입술만 삐죽이며 내 앞에 놓인 소주잔에 잔을 쨍깡 하고 부딪혀 온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잔을 들고 꼴깍 마시려고 입에 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잘 거냐고 말 거냐고요....."
먹던 소주가 살짝 튀어 나갔다. 드라마처럼 푸훕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턱 주변으로 슬쩍 흐르는 정도로. 누나는 아까와는 달리 빤히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몇 초간 멍하니 있었다. 그 큰 눈망울을 꿈뻑, 끔뻑하더니마는 "나 갈래." 하고는 주섬주섬 외투와 가방을 집어 든다. 어어? 가게요? 같은 멍청한 소리를 하며 일어섰다.
누나는 기어코 카드를 꺼내며 "여기는 내가 내. 쬐끄만 게 돈 쓰는 건 어디서 배워가지고.." 라며 자기보다 20센티는 큰 우람한 사내를 밀쳐내었다. 빙그레 웃는 알바 앞에서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잘 먹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누나는 성큼, 성큼 가게 밖으로 나섰다. 휘청이는 게 위태로워 재빨리 옆에 가서 팔꿈치를 잡았다. 반대 손으로 손을 까닥이더니 이내 내 팔을 잡고 고개를 댄 채 허리를 반쯤 숙여 매달린다. 괜찮아요? 누나는 고개를 젓다가 다시 끄덕인다. 안 괜찮구나. 택시라도 잡으려면 길가로 나가야 해서 누나를 잡고 천천히 걸었다. 몇 걸음을 걷다 누나는 갑자기 히히히히, 하고 웃는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하고 물으니, 우리 모텔 안.. 갈래요? 히히히히 하고 웃는다. 아 진짜 누나 아오 크크크 하고 웃어넘기는데, 누나는 고개를 들어 서글픈 표정으로 위를 본다.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달 모양의 눈매로 웃으며 장난이야 이 순진한 놈아 하고 팔을 뿌리쳤다. 어어, 나 잡아요. 하고 다시 누나를 붙잡으려 하자 누나는 떽! 혼자 잘 갑니다....... 하고 옆으로 한 걸음 비틀거린다.
약간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 거리를 걸었다. 손등이 팔과 조금 스치는 정도의 그 거리를 유지하며 가끔 오른쪽으로 비틀, 왼쪽으로 비틀하며 천천히 밤공기를 마셨다. 역 근처까지 나오니 택시들이 줄을 서 있다. 누나는 택시를 보더니 나 간다! 하고는 손을 두어 번 흔들고 이내 뛰어간다. 그러다 넘어져요! 비틀거림은 온데간데없고, 쏜살같이 택시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간다. 차창 너머로 인사라도 하려 했건만 창문도 열지 않고 쌩 하니 출발한다. 겨우 차 넘버 네 자리만 누나에게 카톡으로 남겼는데, 1이 없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직 막차가 남아있을 시간일까 싶어 역으로 돌아가다가 문득 만사가 다 귀찮아져서 그냥 학교 과실에서 잘 요량으로 학교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내내 아까의 어리숙함이 맘에 걸렸다. 자러 간다고 냅다 좋다고 그랬어야 했을까? 진짜 잤으면 어땠을까? 누나랑 나는 무슨 사이인 걸까? 장난이었던 걸까? 내가 너무 농담을 못 받아준 건가? 혼란스러움 사이로 스멀스멀 후회가 올라왔다. 누나는 예뻤고, 나한테는 과분할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인연이 이어져 종종 만나는 사이가 되었지만 친한 동생, 아는 사이에 가까웠다. 그런데 오늘 그 시간들이 되려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 친구로서 보내온 시간들이 그 순간의 대답을 망설이게 했으니까. 잘한 걸까? 아쉬움과 후회, 잘했다는 다독임을 반복하며 학과실로 향했다.
"어? 오빠!"
건물에 들어가려는 찰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두 학번 후배가 종종거리며 뛰어온다. 이 시간에 웬일.. 아! 술 먹었죠! 술냄새 난다! 나만 빼놓고! 새초롬하게 웃는 이 녀석을 보니 남의 속도 모르는구먼 싶어 꿀밤을 쥐어박고 싶었다. 능청스레 내 옆구리에 손을 대며 오빠 맨날 밤에 술 먹으니까 이 살 좀 봐 살 하고 톡톡 두들긴다. 문득 누나가 내게 했던 농담이 생각났다. 누나랑 잘래요? 나는 그 애의 손을 낚아채 확 잡아당겨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꺅, 하는 소리와 함께 한참 작은 여자아이가 품에 쏙 들어왔다. 너 내가 남자 몸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고 했지. 휘둥그레진 눈과 마주쳤다. 헤실헤실 웃으며 잘해주는 착한 오빠 이미지를 이 참에 탈피해볼까 싶어 눈을 마주친 채 한쪽 어깨를 잡고 슬그머니 그 애를 살짝 밀며 조금 허리를 숙였다. 그 애와 눈높이가 어느 정도 맞아갈 무렵, 후배는 얼굴을 살짝 뒤로 뺐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키스라도 할 기세로 천천히 눈을 바라보며 거리를 좁혔다. 후배는 약간 벌린 입으로 오.. 오빠.. 하더니 잡히지 않은 한쪽 손으로 날 밀어내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정도면 됐겠다 싶어 멈추려 했더니 웬걸,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것이다. 순간 웃음이 터졌다. 야, 눈을 아주 지그시 감으시는구만 지그시. 너 뭘 기대한 거야! 야밤에 빵 터진 나, 후배는 네? 네??? 아! 아 진짜! 하며 들고 있던 백으로 날 후려쳤다. 아야야 미안! 야 그러니까 외간 남자한테 자꾸 손대고 그러지 말라는 거지!!
후배는 몇 번을 더 때리고 나서야 오빠 진짜 못됐어!! 하고 빽 소리를 지르곤 성큼성큼 가버렸다. 아 거참 짜식 많이 민망했나.. 얼얼한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 애의 뒤에 대고 내일 보자! 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누나도 나한테 이렇게 장난을 친 셈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건물 계단을 오르며 스마트폰을 여니 아직도 누나의 1이 없어지지 않았다. 만약 누나랑 잤으면 오늘부터 여자 친구라도 생기는 거였을까..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 카카오톡을 열었다. 이 시간에 마땅히 쓸데없는 얘기로 외로움을 달랠 사람이 없었다. 아까 그 후배나 붙잡고 차라도 마시며 수다 좀 떨걸.. 하는 아쉬움이 드는 밤이었다. 난 언제 애인이 생기려나. 애인이 태어나기는 하셨나. 그놈의 썸이라는 것좀 나도 해보고 싶네. 전생에 얼마나 못되게 살았던 거야... 가뜩이나 추운 과실의 소파에 괜스레 투덜거리며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