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츠메 소세키 대신 소새끼
지하철보다 버스를 좋아하는 것은 게으름의 탓이다.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출구가 아니면 내려가기도, 올라가기도 귀찮아하는 젊은이에게 젊음은 사치재일지도 모른다. 정수리가 밝아지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서울에서는 지하철을 타는 편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계획적으로 움직이기가 좋다. 버스가 아무리 많고 편리해도.
그런 면에서 최근에 이동할 장소가 전부 버스로 한 번에 움직일 수 있는 곳이라는 건 신기한 일이다. 보통은 이렇게 딱 편리하게 버스 노선이 똑 떨어지는 일이 적기 때문이다. 심지어 타는 위치가 절묘하여 자리도 넉넉할 때가 많다. 기점의 근처라거나, 종점의 근처라거나.
예전에는 늘 버스를 타면 통화를 했다. 통화를 하거나, 카톡을 주고받거나.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삶의 틈을 뜨개질처럼 이어가며 통화할 일이 없다. 어쩌면 그 뜨개질이 무척 답답하고 무거웠을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버스에서의 반추가 시작된다.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나는 떠오르는 기억들을 되새김질한다. 덜컹거리는 버스는 천천히 갓길로, 중앙차로로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목적지를 향해가고, 나는 끝없이 과거로, 과거로 침잠해간다. 귀를 막은 이어폰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고,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의 풍경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다. 때로는 아주 먼, 아장거리는 어릴 때의 기억까지도 돌아가다가, 어떨 때는 몇 시간 전의 기억을 붙들기도 한다. 때로는 그 기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헷갈려하다 보면 이내 잠들어 버릴 때도 있다.
버스에서의 시간은 그래서 늘 빠르게 지나간다. 가만히 입 안을 맴도는 소리들을 어금니 사이로 굴려낸다. 꿀꺽, 하고 되새김질했던 기억의 비명들을 삼킨다. 어떤 것은 추억이 되고, 어떤 것은 망각이 되길 바라고. 어떤 것은 영영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생각으로 꾸벅, 고개를 조아린다. 한마디 말도 없이, 멈추지 않고 모래사장에서 사금을 건져내듯 삶의 여기저기를 채로 들썩이며 조각난 것들을 걸러낸다. 어떤 것들은 너무 많이 반추하여 망 사이로 쑥쑥 빠져나가고, 어떤 것들은 쌩쌩하니 걸러져 나온다. 그것을 또 여러 번 되새김질하다 보면, 날카롭게 긁어대던 기억들이 반들반들하게 줄어들기도 한다. 되새김질은 그래서 상흔을 남기기도 한다. 삐죽이던 모서리들을 갉아내며 파여가는 곳들은 마음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지만, 이내 버스의 덜컹거림 탓으로 떠넘긴다. 그러다 보면 또, 잠이 들고 이내 꾸벅이다 창가에, 혹은 손잡이에, 혹은 서 있는 사람의 다리에 부딪혀 화들짝 돌아온다. 그러고 나면 어디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희미해지고, 침은 흘리지 않았을까 하는 초조함으로 조심스레 입가를 매만지고, 내릴 곳을 지나친 건 아닐까 하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창 밖을 본다.
그리 오랜 시간을 살아온 것은 아니기에, 되새김질할 일도 옅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살지 않아 와서, 아직 잊히기에 이른 것들이 깨진 병조각처럼 바닥에 얼기설기 늘어져있다. 한 시간이 넘는 버스길, 20분이면 도착하는 버스길, 길든 짧은 뭔가를 맨 발로 밟아가며 눈을 감는다. 그렇게 매일 타는 버스 속에서 희미한 일들을 희미한 의식 속에서 어루만져본다. 반성도, 회한도, 후회도 묽어진 채로 버스는 도로를 굴러간다. 나도 함께 덜컹이며 삶을 굴려간다. 띠딕, 하고 졸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버스에서 내릴 때에야 비로소 긴 반추는 끝이 나고, 무슨 생각을 했더라. 하며 큰 하품으로 어지러움을 떨쳐낸다. 오랜 시간 입을 닫고 마음을 굴려댄 탓인지 단내가 올라온다.
아니, 잠깐. 오늘 양치를 까먹었었나. 억, 그럼 반추가 진짜 그 반추였나. 완전 소나 다름없네. 대낮이 되도록 양치도 까먹고.. 완전 낮쯤에 소새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