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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wpw Oct 13. 2019

이별의 시작

제 3자의 이별


가을 옷을 예쁘게 차려입은 남녀가 집을 나오기 전에는 이별을 준비했을까. 분홍색 종이로 쌓인 꽃다발을 가슴팍에 던졌을 때, 꽃향기가 그 남자에게는 느껴졌을까. 숙취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동네 커피숍을 향하는 길에, 우연히 남의 이별을 목격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머리 위는 하늘색인데, 저 멀리 교회 십자가와 커다란 빌딩 사이로는 샛누런 하늘이 이어진다. 도시의 가을 하늘 답다는 생각과 함께, 비단 하늘이 아니라 사람 사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마주 보고 있으면 맑고 푸르른 그대도, 한 발자국씩 멀어지다 보면 샛누런 색으로 변해간다. 둘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어쩌면 아직도 한 사람만큼은 푸르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활짝 핀 미소와 어울렸어야 할 꽃송이들이 거뭇한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 둘은 왜 아무도 꽃다발을 잡으려 하지 않았을까. 서로의 색이 다른 온도로 변해가는 것을 그들은 막을 수 없었을까 하는 의미 없는 물음이 떠오른다.


남자의 트렌치코트와 넓은 어깨, 쭉 뻗은 손가락, 말끔한 얼굴이 그녀에게 사랑이었을 때, 그 역시 그녀를 사랑했을 터였다. 이유는 한 가지일지도, 혹은 여러 가지 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헤어짐에는 몇 가지 이유가 필요했을까. 꽃 집주인에게 예쁜 꽃을 골라 담던 남자의 마음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이딴 거 필요 없다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들어버린 여자의 비명에, 나는 무척 개인적이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그 순간의 모습에 상상을 더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별이, 누군가의 보편이 되어 그려진다. 


여자의 발걸음이 하염없이 멀어진다. 남자는 천천히 꽃다발을 줍는다. 뒤 돌지 않는다. 만남이 사랑의 시작이었듯이, 헤어짐은 이별의 시작이다. 그것은 긴 계절과 함께 흐를 것이다. 절기가 바뀌고, 하늘의 색이 바뀌고, 망가진 꽃다발의 향기가 사그라드는 것과 함께 이별은 발걸음을 맞춘다. 이윽고 도로 끝에서 사라지는 '저 여자'를 보며, '그 남자'는 걸음을 옮긴다. 


커피숍이 있는 모퉁이를 돌자, '저 여자'가 건물 벽을 바라보고 서있다. 실례가 될까 싶은 마음에 눈길을 두지 않으려 해도 어깨의 들썩임이 크기도 하다. 남자에게는 이별의 시작이 꽃 향기였다면, 여자에게는 차가운 대리석의 거뭇한 때 낀 기둥의 모습이다. 모퉁이를 돌기만 하면 이어질 수 있는 끈은, 누구의 마음 탓인지 멀어져 간다. 흔하디 흔한 이별,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의 순간이나 다름없지만 둘에게는 오늘을 잊기가 무척 힘들 것 같았다. 


오늘의 커피를 들고 나왔을 때, 거리에는 그 남자도, 저 여자도 온데간데없다. 다만 서로의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 몇몇 커플들만이 이 자리에는 어떤 슬픔도 없었던 것처럼 밝은 미소로 거리를 걷는다. 발걸음 사이로 느껴지는 가을바람에 사랑을 남기는 사람들. 그 예쁘고 애틋한 마음들 만큼이나, 누군가에겐 꽃과 바람이 오래도록 그리움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들의 평화를 빈다. 생각보다 오래도록 덜어내야 할 이야기의 마침표에도 향기가 남아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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