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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Sep 13. 2016

33.


신새벽 눈을 비비며 맞이한 치앙마이의 새벽은 싸늘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한기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승객들이 정류장 한 편의 썽태우로 옮겨 타자 차량은 곧 붉은 가로등을 듬성듬성 스치는 단출한 2차선의 거리에 올랐다.


러이 끄라통(Loi Krathong)이 목전이었다. 길가의 숙소들은 하나같이 FULL이었고 봐 두었던 숙소 역시 자리가 다. 친절한 스텝이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빈 방을 찾아주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에 열심인 데다 귀찮을 법도 한데 연신 웃는 얼굴이니 치앙마이의 첫인상이 좋다. 그렇게 그녀가 찾아준 숙소의 마지막 방을 차지했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리셉션 유리창엔 'FULL' 사인이 붙었다. 한참이나 구석진 숙소였는데 이마저도 꽉 찼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와있는 걸까? 기대감이 부풀었다.






보름달이 떴다.


밝은 남색의 하늘, 연노랑의 달, 옅은 회색 구름. 완벽한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해 고개를 있는 대로 치켜들고 타페 게이트로 향했다. 근처부터 복작복작한 사람들이 축제의 소란한 기운을 옮기고 있었다. 종이로 만든 하얀 풍등에 뜨거운 공기가 가득 차면 사람들은 손을 놓고 등을 하늘로 띄워 보냈다. 그렇게 일렁일렁 부푼 풍등이 하나, 둘 하늘을 채웠다. 주홍색의 수없는 작은 빛들이 밤을 건넜다. 둥둥 북소리가 귀와 을 함께 울렸다. 수많은 사람만큼 많은 꿈과 염원이 하늘에 올랐다. 아름다웠다. 저 중에는 사랑도 있고, 희망도 있고, 목표도 있고, 가족의 건강이나 행복도 있겠지. 두 눈 꼭 감고 두 손 맞잡아 실어 보낸 예쁘고 소중한 바람들이 빠짐없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참방참방 물을 헤치고 초를 띄우는 사람들과 강변을 따라 늘어선 깜빡이는 빛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억을 팔아 뭐든 살 수 있다던 국경시장이 떠올랐다. 이따금 떠오르는 풍등이 환상에 깊이를 더했다. 다리 위에서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어느 날 국경시장에 발이 닿아 어떤 값진 물건을 살 수 있 된다 해도 이 기억을 팔지는 않겠노라 다짐여몄다.












여행을 하는 동안 좋아하는 사람이 여럿 생겼다. 이전에는 주는 만큼 받고 싶기도 했는데 점점 그런 일에는 아랑곳 않게 되었다. 무어라도 더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쁠 뿐이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더 많은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준만큼 받지 못한다고 해서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깨닫는 일이기도 하고.


여담이지만 인도에서 첫 디아를 띄우던 순간부터 오랫동안 내 소원은 동일했다. '이 순간을 기억하게 해주세요'. 이제와 생각해보면 참 영악하고 간사한 것이 내가 빈 것은 늘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소원이었다. 기억한다면 이루어질 것이고 기억하지 못한다면 소원을 빌었다는 사실마저 잊을 테니까. 어쨌든 이번 풍등에는 지난 5년과는 다른 소망을 실었다. 'J의 소중한 인연이 되게 해주세요' 하는. 그의 존재가 나의 세상을 아름답게 하듯 나 또한 그의 삶에 작은 위안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랐다. 언제까지고 그의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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