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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Oct 26. 2016

'어디에 사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

오늘도 한 소쿠리의 시간을 팔았습니다


언제고 사장은 개미를 알아본다.


지난달에 도시를 옮기고서는 한동안 여기저기 레쥬메를 내고 돌아다녔는데, 어쩌다 보니 3일 간격으로 덜컥 두 개의 일이 구해졌다. 짧은 인터뷰에서도 느껴지는 개미 근성 덕분이었으리라. 나중에 구한 쪽이 더 마음에 들긴 하는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일을 갑작스레 그만두는 일도 내키지 않아서 한동안 생각에도 없던 투잡(two jobs)을 뛰었다. 죽을 뻔했다.


첫 번째 일은 7시 30분이나 10시에 시작해 3시나 4시쯤 끝났다. 두 번째 일은 5시 30분에 시작해 11시나 12시까지. 늦은 밤 집에 돌아오거나 남는 시간이 생기면 곧장 쓰러져 자기 바빴다. 그렇게 지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스스로에게 할애할 시간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여가를 몽땅 잠에 쏟아부어도 하루는 늘 피곤했다. 충혈된 눈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뼈저리게 느꼈다. 과연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구나. 뻔히 짐작되는 바도 겪고 나서야 진실로 이해하게 되니 나는 언제나 어리석다. 주체성이 배제된 삶은 급속도로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육체의 피로와 함께 정신적 피로도 급격히 증가했다. 생각하지 않는 시간, 의미 없는 대화, 내가 나일 수 없는 모든 순간이 아까웠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했다. 내 삶에서 내가 뿌리째 뽑힌 기분이었다. 그 시간을 견뎌내면서 나는 지워지고 굳어지고 빠져나가 쭉정이가 되다. 살아있지만 사는 것 같지 않았고, 그 시간들이 내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웠고,

의도대로 되지 않는 공허한 시간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출퇴근길엔 피로에 눌린 몽롱한 정신으로 '시간'과 '일'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다.


종류를 막론하고 노동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일은 '시간'을 지불하고 '돈'을 받는 행위가 된다. 시간으로 돈을 벌고, 돈으로 시간을 사는 미묘한 굴레. 그러니 물질세계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돈이라기보다 시간이었다. 그 가치가 모두에게 같은 값으로 지불되지 않을지라도.


<시간이 곧 돈>이라던 옛  시간의 귀중함을 역설하는 어구 쯤으 여는데 어쩌면 문자 그대로 시간이 곧 돈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은 곧 정리를 했다. 한 주가 지날 때마다 잔고는 쑥쑥 불어났지만 그런 '죽은 삶'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살자고 버는데 버느라 못살면 곤란하지 않나. 일을 그만둔 뒤에도 일주일 가량을 우왕좌왕한 뒤에야 겨우 일상을 되찾다. 짧은 기간 동안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폐해졌지만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어디에'(장소) 보다는 '어떻게'(방법)와 '누구와'(사람)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 준 대가 치고는 제법 저렴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어떻게 하면 '어디서든' 잘 살 수 있을까,

에 관한 고민을 한다.


현실적인 문제들과 포기할 수 없는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방법을 강구해보는 중. 현실과 이상은 정 반대의 먼 섬 인 줄로 알았지만 어쩌면 맞닿은 채 금 그어진 하나의 길인지도 모른다. 끝없이 교차되고 갈라지고 빗겨나가는 두 개의 길인지도 모르고. 신나게 양 손 흔들며 이상과 현실 사이를 비틀비틀 넘나들 수 있을 것도 같다. 기우뚱기우뚱 갈팡질팡 언제까지고 걸어갈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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