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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Oct 31. 2016

잊혀진 계절

을 기억합니다


시월이 오면 괜스레 쓸쓸하다.


시월-, 하고 가만히 읊조리고 나면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인다. 시옷 발음이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순간부터 그렇다. 여태 찬 기운도는 날씨 탓인 줄로만 알았는데 한국을 떠나 날로 뜨거워지는 시월을 맞고도 허구한 날 까무룩 상념에 잠기는 걸 보니 이맘때면 서리 맞은 이파리 마냥 쳐졌던 이유는 아마 '시월이기 때문' 인가 보았다.


언젠가부터 매년 시월이면 <잊혀진 계절>을 찾아 듣는다. 별 다른 이유도 없이 마음이 시큰할 때마다. 시월에 듣는 잊혀진 계절은 상처 위에 붙이는 밴드 같다. 일회용 밴드 하나 붙인다고 상처가 아프지 않거나 빨리 낫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한 꺼풀 보호막이 되어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이 달도 그 계절을 참 많이 들었다. 시리도록 청명한 나의 계절.



Brisbane, AU (2016)



근면성실(勤勉誠實)은 내가 평생을 앓은 병의 이름이다. 나는 답답하리만치 꽉 막힌 데다 지나치게 성실하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볼까. 나는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그리고 대학 4년을 결석은커녕 지각 한 번 없이 보냈다. 새벽까지 술을 퍼먹어도 강의만큼은 기어서라도 갔다. 내게 출석은 명백히 해야 할 일이었고,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야 하는 일은 해야만 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졸업을 한다고 그 성미가 어디 갈까. 내가 잡일에 얼마나 유능했는지를 다시금 깨닫고 있는 요즘, 나는 다시 한번 크게 근면성실을 앓고 있다. 누군가는 재능이라 했고 누군가에겐 그렇기도 하겠지만 내게 이건 아무래도 병이다.


문제는 내가 베짱이를 지향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나는 십 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인생관으로 삼았고 송순의 <십 년을 경영하여>를 비문처럼 새겼으며 무릉도원(武陵桃源)과 선비 라이프를 오래도록 꿈꿔왔다. 그런데 타고나기는 뼛속까지 개미라니. 여기서 가치 충돌이 일어난다. 나는 베짱이가 되고 싶은데 정말이지 주어진 일이라면 열심히 하지 않고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는 거다. 꾀부릴 줄 모르고 부지런한 데다 서비스 마인드 투철하고 사그라들지 않는 개미 근성에 화룡점정 가미된 노예근성으로 두 사람 분의 일쯤은 거뜬히 해내는 나는 언제나 좋은 워커(worker)다. 그럼 뭐해. 사장의 사랑과 신뢰 같은 건 별로 받고 싶지도 않은데. 일을 시작하고 보면 늘 내가 바라는 삶은 멀어져만 가는데.












원래 네다섯 명, 혹은 여서 일곱 명이 일했다던 카페에 두어 달 째 혼자 일하고 있다. 빌어먹을 성실로 빈자리를 채우는 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그만두고 왔다가 그만두길 반복했다. 지지난 주쯤에 새로 왔던 언니도 일주일을 못 버티고 퉁퉁부은 눈으로 가게를 그만뒀다. 훌쩍이는 언니를 본 남자 친구는 내게 와서 '오늘 그만둔다고 할 거니까 조금만 더 챙겨주세요.'하고 말했다. 눈에 그렁그렁 걱정을 가득 담고서. 나보다 열 살쯤 더 많은 언니였다.


엊그제는 찰스의 아들인 마이클이 아팠다. 확연히 어두워진 표정으로 그는 다 큰 아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따뜻한 물을 떠다 약을 먹이고 맨 손으로 토사물을 치웠다.


찰스는 마이클을 걱정하고,

오빠는 언니를 걱정하고.


...


나는?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안 나오면 자다 일어나서 그렇다고 말하는 나는. 잘 지낸다, 잘 먹는다, 아무 일도 없다, 괜찮다가 선택지의 전부인 나는 바보같이 조금 글퍼 버리고 말았다. 힘들다고 하면 아프다고 하면 혹여 걱정이라도 할까, 그 말 끝에 그만 돌아오라고 하진 않을까 두려워 나는 오늘도 괜찮고 내일도 괜찮고 모든 것이 지루하리만치 평화롭다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서 힘들고 아프고 서럽고 외로웠다. 플레이리스트를 뒤져 몇 번이고 잊혀진 계절을 들었다.



아아, 다 지난 일이다. 괜스레 쓸쓸했던 것도 다 시월인 탓이겠지, 그러니 내일이면 괜찮아지겠지. 스스로를 토닥이며 오늘은 대낮부터 술을 마셨다. 시월에 안녕을 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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