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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Nov 10. 2016

BETWEEN

Walk in holiday & Woking holy-day


01.


오늘로 호주에 온 지 6개월이 지났다. 종종 여행을 다녔다곤 해도 꼬박 반년을 떠나 있는 것은 처음이다. 파란 눈, 노란 머리, 영어를 쓰는 사람들과 부대낀다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것이 없다. 매일매일 부지런히 살기는 했는데 벌써 6개월이 지났다는 건 역시 거짓말 같다. 아니, 뭐가 이렇게 후루룩 지나버렸지?



02.


지난 5월, 평소처럼 배낭 하나 짊어지고 떠나는 나를 배웅하며 엄마는 연신 눈물을 찍어냈었다. 1년이라는 막막한 시간의 무게가 다른 때보다도 무거웠던가 보았다. 괜히 아무렇지 않은 내가 죄스러웠다. 공항에 도착하고도 한참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보내는 일이 힘들어 늘 다른 사람을 먼저 보내면서도 엄마에게서는 매번 떠나왔다는 걸. 떠나는 사람은 나, 남는 사람은 엄마. 나는 늘 엄마를 내 뒤에 남겼다. 그걸 그제야 알았다.



03.


나는 스스로가 '똑 부러진다'는 말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왠지 다들 '똑' 부러진 인간이니 잘 해낼 거라며 확신에 찬 응원을 보내왔다. 어쨌든 이런 말을 들으면 잘 하고 싶어 진다. 핸드폰에서 고개를 들어 눈 앞의 해안 산책로를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했다.



Katherin, AU (2016)



04.


농장에 있는 동안 가장 자주 부른 노래(?)는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하는 태평가의 한 구절이었다. 몸이 고되면 더 많이 웃고, 노래했다. 어쨌든 시간은 흐를 테니 열심히, 즐겁게 보내는 편이 낫지 않은가-하고 보면 힘든 일도 없었다.



05.


그간 3개월쯤은 놀고 3개월쯤은 일했다. 일과 휴식이 균형 있게 병행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좋다. 언젠가 S가 물었다. '돈 벌려면 호주로 가면 되나?' 


올래? 돈은 못 벌고 있지만.


대답했더니 어쩐지 '좋은데?' 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돈을 못 버는 게?' 되물었더니


돈을 못 번다는 건, 돈에 목메고 있지 않다는 뜻이지.


하고 답해 왔다. 아하, 나는 돈에 목매지 않는 삶을 살면서도 모르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가 궁금해한 것은 '스스로가 만족할 정도의 생활인가' 하는 것이었다. 좋은 벗을 두었다고 생각했다.





06.


B는 나를 새 같다고 했다. 가볍고 활기차게 훨훨 나는 새.


누군가는 나를 바람이라 하고, 누군가는 나를 새라 하는데

나는 스스로를 나무라 느낀다.


누군가는 정신을 차리라 하고

누군가는 오래도록 그리 살아달라 하는데

나는 좀처럼 마음을 정하지 못하겠다.


나는 바람이고 싶은가? 새이고 싶은가? 나무이고 싶은가?



07.


영어로 말을 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오히려 Hello 인사하면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거나 Thank you라는 말을 들은 뒤에 어버버 하지 않는 등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언어보다도 문화나 습관이랄까. 지난 시간은 내게도 깊은 흔적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워낙 따라 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곧 'No worries'를 습관처럼 말하게 되었고 이런저런 줄임말에 익숙해졌지만, 글쎄. 정말로 편안해지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08.


300개가 훌쩍 넘는 샵(Shop)이 입점해 있는 이 거대한 쇼핑센터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직원들이 있다. 관찰 결과 나를 비롯한 90퍼센트 이상의 스텝이 검은색 옷을 입는다. 검은 우리는 모두가 그림자 같다. 개인은 지워지고 한 명의 직원이 남을 뿐이다. 주에 5일을 검은 채로 사는 일은 그다지 즐겁지 않아서 휴일이면 아주 밝은 옷을 찾게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빨랫줄에 널린 것은 다섯 장의 검은 티셔츠.



09.


어느 날은 터벅터벅 출근을 하는데 이 흥미롭지 않은 풍이 모두 거짓 같았다. 봄 맞은 새싹이 산뜻한 연녹색 들판무채색으로 느껴졌다. 싸구려 인형의 집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허술했다. 조악한 붉은 벽돌은 종잇장처럼 얇아서 언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바삭, 구겨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옅은 하늘을 찢고 진짜 해가 나타날  같았다.


아, 종이로 만든 세상에 살고 있어.


 

Brisbane, AU (2016)



10.


최근엔 무엇보다도 삶에서 '재미'의 요소가 많이 소거된 느낌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한참을 생각했지만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고 아쉬운 대로 주변에서 소소한 기쁨을 찾아보기로 했다.



11.


요즘 가장 좋아하는 일은 카푸치노를 만드는 일이다. 호주에선 카푸치노에 초콜릿 파우더를 뿌린다. 뜨거운 우유 거품 위에 초콜릿 가루가 스미듯 녹아들고, 그것이 위태롭고 풍성하게 팽창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매번 새로운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과 같다. 커피잔 위에서 하루에도 수십번 빅뱅을 본다. 경이롭다.



12.


비슷한 맥락에서 티를 만드는 일도 좋아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블랙티를 마셨는데 요즘은 순전히 재미를 위해 화이트 티를 즐겨 마신다. 우유를 부은 후에 붉게 맑아지는 차의 색도 좋고, 안개처럼 피어나고 번져가는 우유의 결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일도 좋다. 한결 부드러워진 맛도 색다르다.



13.


카페에는 매일 한 무리의 그리스 할아버지들이 온다. 나는 그들의 Darling, Honey, Beautiful이자 Best이며 Lovely girl이다. 소싯적 여자 꽤나 울렸을 듯한 이 할아버지들을 만나는 일은 즐겁고, 그들의 Little tiny Joy가 되는 일 또한 기쁘다.



14.


이따금은 놀이처럼 '낯설게 하기'를 하기도 한다. 무언가를 '낯설게' 만드는 일은 쉽다. 매일 지나치는 것이라도 모든 세세한 것을 기억할 수는 없으므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몰랐던 것, 새로운 것이 보인다.


그러나 '낯선' 것과 '낯설게 한' 것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영역이다. 익숙한 범위로 편입된 것을 다시 '낯설게'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주의와 관심, 긴장이 필요하다. 에너지 소모가 상당하다.



15.


생활의 형태는 놀랍도록 흡사해졌다. 일을 마친 뒤엔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휴일엔 걷지 못한 길을 찾아 걷거나 앞방 음대생의 건반으로 젓가락 행진곡 따위를 연주하거나 영화관에 가거나 외식을 하거나 조용한 카페 따위를 찾아다닌다. 역시 '어디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 같다.



16.


일사불란하게 달려 하얀 콘크리트 위에 금을 긋는 개미나 까맣게 타버린 토끼풀 위를 나는 나비, 날마다 노란색이며 보라색으로 피어나는 풀에 걸음을 멈추는 나날이다. 이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엔 고꾸라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자유,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에 발이 묶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17.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일을 겁내지는 말아야지-

주기적으로 다독이며 산다.



18.


지난해 10월부터 태국, 인도를 거쳐 케언즈, 다윈, 그리고 점점 뜨거워지는 브리즈번까지. 1년을 거진 여름으로 보내다 보니 겨울이 어지간히 그리운 모양인지 당장 필요도 없는 니트며 털모자 따위를 사모으고 있다. 아무래도 다음번엔 겨울나라에 가야 할까 보다.



19.


사람의 일은 정말로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렇다.

(도대체 최순실 게이트나 트럼프 당선을 상상이나 했던가 말이다.)


또 다른 6개월 후에는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까?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기대하고 있다.

뭔가 기상천외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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