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잉지 Jun 14. 2017

SAY CHEESE-!

과거와 존재의 증명에 대한 욕망


늘 무언가 잃어버린다. 가장 최근의 상실은 지난 8월, 도시를 이동하던 날이었다. 그 날은 핸드폰 외장 메모리를 잃어버렸다. 배터리를 갈 때 빠진 모양이었다. 30G가량의 사진과 음악, E-BOOK이 모두 사라졌다. 백업도 없다. 허- 참. 혼이 반쯤 빠진 채 지내던 숙소에 전화를 걸고 혹시나 싶어 버스 바닥도 샅샅이 훑었지만 새끼손톱만 한 메모리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기억과 기록의 한 조각을 잃어버렸다. 허무했다. 미련이 많은 미련한 인간은 한동안 뻔히 없는 것을 알면서도 배터리 커버를 열어 외장 메모리가 있던 자리를 쓸어보곤 했다. 자꾸 들여다보면 빈자리에서 메모리가 쑥쑥 자라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필 이동하는 날에

하필 배터리를 갈아서

하필 외장 메모리가 떨어지고

그걸 또 하필 버스에서야 깨닫다니.


놀라운 우연의 연속이 옹기종기 모여 상실감에 허덕이는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허- 참.






한순간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것. 가상의 것은 너무도 쉽게 부서지고 사라진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는 애잔한 노력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생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일깨운다. 돈이나 물건보다도 사진이나 수첩을 잃어버렸을 때 더 큰 허무를 느꼈다. 마치 삶의 한 조각이, 그러니까 나의 일부가 뭉텅 떨어져 나간 기분이랄까. 슬금슬금, 혹은 야금야금 사라졌다면 눈치도 못 챘을 사소한 기억일 뿐인데-. 잃어버린 대부분의 순간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의아했다. 이렇게 쉬이 사라지는 기억이라면 그것이 정말로 소중한 것이었을까.


그때의 상실감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

소유하던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한 박탈감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Melbourne, AU (2017)



어느 날은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달무리를 발견했다.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몇 장을 연거푸 찍다 말고 아차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의식적으로 일상의 순간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모습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사진 찍기가 참 쉬워졌다. 굳이 무거운 카메라를 구비하지 않아도 핸드폰이면 충분하다. 퀄리티 차이야 있겠지만 언제라도 담고 싶은 것쯤은 놓치지 않고 담을 수 있게 됐다. 언제부터일까? 아름답거나 흥미롭거나 기억하고픈 무언가를 발견하면 가장 먼저 카메라를 찾아 가방을 뒤적이게 된 것이. 습관으로 굳어진 기록에 대한 의구심과 그럼에도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스스로가 불편한 나날. 도대체 나는 왜- 찍는가?






사진은 크게 세 가지 기능(혹은 목적)을 가진다.

기억을 돕는 수단이거나 일상의 소유, 혹은 존재의 증명. 


이미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이고 과도한 집착은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집요한 애착이기도 했다. 그것은 쉽게 과거를 향한 집념으로 형상화된다. 












과거는 가질 수 없는 것이어서 그것을 향하는 어리석고 아름다운 열망은 사그라들 줄 모른다.


존재는 시간 속에 유착되어 시공간의 특수한 한 점에 영원히 고정되고, 지난 시점의 사건은 결코 바뀌지 않는 과거로 남는다. 사진은 내게 일종의 과거다. 정확히는 입증할 수 없는 과거를 증명하는 도구. 사진을 찍는 행위가 가진 일방성과 폭력성을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습관처럼 사진을 찍는다. 그것으로 변화하는 세계의 단면을 붙잡을 수 있다는 듯.


카메라는 너무도 익숙한 기록의 도구가 됐다. 거의 모든 이의 취미가 된 사진은 주위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부추긴다. 프레임 안에서 순간은 소유할 수 있는 사물이 된다. 익숙한 것은 흥미로운 것이 되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평가의 대상이 된다. 한 때 세계의 단면이'었'던 선택된 순간은 환상을 간직한 채 포착된 이미지로 남는다. 그렇게 사진은 지나간 현실의 증언이 된다. 일상은 기록할 가치가 있는 피사체가 되고 때로 하나의 작품으로 격상되어 프레임 안에 박제된다. 


개인의 이미지 생산이 활성화되면서 우리는 사진을 통해 순간을 소유하는 일에 너무도 익숙해졌다. 일상적인 현실은 이미지의 형태로 치환되고 쉴 새 없이 소비된다. 그러는 동안 경험과 사진의 의미가 비등해지고 일상은 사진을 모으는 일과 동의어가 됐다. SNS와 메타데이터는 타인의 경험마저 손쉽게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게 만들었다. 과거와 현재, 정보와 경험의 경계가 뒤죽박죽 섞여버린 이미지 과잉의 세계에서 우리는 서서히 이미지를 소비하는 일에 중독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과거의 '장면'과 흥미로운 '순간'을 소유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어쩐지 과거를 온전히 향유하는 일과는 멀어진 것 같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이 불편한 건 그런 이유다.


미니멀(Minimal)과 거리가 먼 나는 온갖 저장장치에 잉여 데이터를 축적하며 산다. 죽는 날까지 내 삶은 몇 기가의 기록이 될까? 나조차 알지 못하는 방대한 기록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집약된 기억으로 삶은 대변될 수 있나?



매거진의 이전글 전혀 다른 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