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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Jun 25. 2017

트라우마 제조기

각자의 방식


브리즈번의 카페에서 일하던 기간은 '트라우마 제조기(期)'라 이름 붙이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중 9할 8푼은 사장인 C 때문이다. 그와 함께 일하는 동안 나는 대략 30년 치의 인류애를 잃었다.






주 평균 45-50시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60시간을 그와 함께 일했다. 익숙해지지 않는 괴로움이었다.


그는 심각한 분노조절 장애를 갖고 있었으며, 인종차별, 성차별, 외모 차별뿐 아니라 견고한 가부장적 가치관까지 겸비한 편견으로 주변 사람들의 일상을 들쑤셨다. 그는 성희롱이 성희롱인 줄도 몰랐다. 어린 여자애들이 지나가면 저거 보라며 히죽거렸고 지난 외도를 자랑처럼 지껄였으며 뚱뚱하다거나 못생겼다거나 하는 이유로 사람을 평가하고 모욕했다. 잊을만하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고, 욕을 하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되는대로 분노를 표출했다. 그것이 나를 향한 분노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본인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므로 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도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변명처럼 주워섬기던 그의 캐치프라이즈는 아마도 "See you never"였을 거다. 컴플레인이라도 들어올라치면 그는 마구 쿵쾅대며 외쳤다. 너 같은 손님 나도 필요 없어, See you never.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에피소드 세 개



01.


호주의 카페는 대개 다이닝을 함께 하는 레스토랑의 개념으로 통용된다. Cafe G에도 아침과 점심을 비롯한 다양한 메뉴가 있었다. 그 날은 페투치니 주문이 들어왔다. 본래 페투치니는 1cm 너비의 납작한 롱 파스타를 일컫지만 C는 편의를 위해 모든 파스타 메뉴에 콘킬리에(중간 크기의 파스타 모양으로 다양한 크기)를 사용했다. 서브된 음식을 본 손님에게 컴플레인이 들어왔다. 이건 페투치니가 아닌데요, 하는 거였다. 타당한 이유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항의를 부정하던 그는 손님이 환불을 요청하자 인상을 구기고 언성을 높이더니 급기야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음식을 접시 째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와우-. 그리고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테이블로 걸어가서는 일행의 커피까지 빼앗아 들었다. 손님은 벌떡 일어나더니 곧장 내게 걸어와 경찰을 부를 거라며 서슬 퍼렇게 경고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도 쟤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곤란한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뭐가 미안했냐고? 그와 일하는 게 나의 죄였다.



02.


C는 굉장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백인은 게으르고 탐욕스럽다며 비아냥댔고, 중국인은 중국인이라서, 인도인은 인도인이라서, 아프리카계는 또 아프리카계라서, 동남아는 동남아라서 싫어했다. 언젠가 이유를 물어보기도 했는데 놀랍고 당연하게도 거기엔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극단적이고 맹목적인 혐오가 근거도 없이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발현될 수 있을까. 무엇으로도 설득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을 앞에 둔 기분이었다.


인도계 청년이 케이크를 배달하고 돌아간 어느 날이었다. C가 오버스럽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요란을 떨었다. 모른 척해도 볼 때까지 할 기세로 어깨를 들썩기에 흘긋 돌아봤더니 한 손으로 코를 움켜쥐고 한 손으론 부채질하는 시늉을 하더니 'So stink-!' 한다. 모욕적이었다. 오만상 찌푸리며 자신의 혐오를 광고하는 그가 정말 싫었다. 그 날로 나는 C에게서 모든 기대를 거두고 가장 수동적인 방법, 포기를 택했다. 나는 좋아하는 것과 선량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울 용기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는 겁쟁이일 뿐.



03.


C는 이따금 반쯤 벗은 여자 사진을 들이밀며 낄낄거리기도 했다. 남자가 어쩌고, 결혼이 어쩌고, 가정이 어쩌고 하는 충고를 가르치듯 늘어놓는 일도 자주였다. 대놓고 불쾌함을 표현해도 그때뿐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시작은 아시안계 남자를 만나라는 거였다. 그는 근거로 호주인과 결혼한 아시안 여자가 감금을 당했다거나, 폭행당해 갈비뼈가 부러졌다거나, 남편에게 강간당했다는 등의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았다. 그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는지 몰라도 학대당하는 약자의 이야기가 즐겁고 흔쾌할 리 없다. 끔찍한 이야기에 분노와 슬픔, 치욕이 뒤섞여 끓어올랐다. 일부러 티 나게 자리를 피하는데도 그는 굳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그의 말을 알아듣는 귀를 차라리 잘라내고 싶었다. 가까이 서 있는 그의 존재를 견딜 수 없었다. 뒤늦게 어두운 얼굴을 보고 괜찮냐고 물어왔지만, 입을 열면 당장이라도 비명이 새어 나올 것 같았으므로 괜찮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비참하고 한스러웠다. 이게 뭐라고, 이게 뭐라고.


 

Melbourne, AU (2017)



바쁘거나 일이 제 맘대로 풀리지 않으면 C는 무작정 화를 냈다. 상황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그의 분노는 활화산 같았다. 예고도 없이 끓어올라 사람을 겁에 질리게 하고 주변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감정뿐 인 것 같았다. 그의 유아적 사고방식은 매번 자신의 기분을 말하는 것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질 못했다.  


나 화났어, 나 화났다구, 나 엄청 화났다니까.


문제도 개선책도 알 수 없었다.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동시에 역시 두려웠다.






언젠가는 그를 연민하기도 했다. 저토록 절박하게 말을 걸어오는 이유는 실은 외롭기 때문이 아닐까, 스스로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도 스트레스 때문은 아닐까 생각하며 이해해보려 했었다. 아무도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는 그는 정말로 불쌍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진짜 문제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누군가 삶 전체를 강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에 불만이었다. 자발적으로 선택 스스로를 얽어맨 의무에서 이탈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로써 마음껏 소리 지르고 화낼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듯 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동이었고, 자기 삶의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 다른 사람을 향한 폭력의 면죄부가 되어줄 수는 없는 거였다.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분노할) 권리를 휘두르는 동안 카페는 늘 불안정했다. 허구한 날 스텝이 바뀌었다. 몇은 화를 냈고, 몇은 울며 뛰쳐나갔는데 대개 두 달을 넘기지 못했다. C가 물었다.


그래, 내 성미가 불 같은 구석이 있어서 가끔 화를 내긴 해. 하지만 평소엔 좋은 사람이잖아. 난 저 애들에게 나쁘게 군 게 없어. 나는 단순하고 선량한 사람이야. 그 애들은 왜 내게 상처를 주는 거야?


가련한 피해자인양 무구한 얼굴. 소름이 끼쳤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번뜩 수많은 범죄자들도 저렇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납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정당한 행동을 했고, 처벌은 가혹하고, 그래서 억울하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털썩 주저앉고 싶어 졌다. 이해하고 싶으나 이해할 수 없는 어느 인간의 한 단면이 절망스럽고, 또 절망스러웠다.



melbourne, AU (2017)



어느 순간부터 C의 분노와 욕설은 하나의 거대한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가 소리를 지르면 몸이 먼저 굳었다. 검푸르고 미끈한 액체가 나를 감싸고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차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생기를 잃고 굳어가는, 축축한 고기 덩어리가 된 느낌. 그건 차디찬 흑막이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일을 가로막는-. 살아있지만 산 것 같지 않았고, 흐르는 시간조차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엔 화를 내다가 나중엔 이해해보려 노력하다가 그저 우울하다가 포기했다가- 종내엔 그를 향한 분노가 나를 향한 분노가 되어 꽂혔다. 스트레스의 명백한 근원과 가장 쉬운 해결책을 알면서도 떠나지 않는 미련한 나에 대한 분노. 나를 미워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있을까. 분노와 상실감과 무력감 같은 것들이 울렁울렁 차올라서 나는 시시때때로 울고 싶었는데, 어둠 속엔 앉아 쉴 벤치도 없어서 그저 걷는 수밖에 없었다. 울고 싶다는 말로 자주 눈물을 대신했다. 무엇보다도 무력할 때, 나는 자주 울고 싶었다.






그것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자기 방어의 일종으로 감정의 스위치를 껐다. 어떤 일이나 감정에 초연 해지는 일은 어쩐지 선택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아서 슬픔과 분노 따위의 감정과 함께 기쁨과 즐거움도 희미해졌다. 포기나 해탈에 더 가까운 상태였으니 굉장히 이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럭저럭 상황을 견뎌 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일을 무덤하게 바라보고 감정의 소모는 최소한으로 줄였다. 한층 사무적으로 삶과 일상을 대하기 시작하며 다시 거짓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더없이 평화로웠지만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인내, 미련, 혹은 게으름.


이런저런 변명들로 C와 함께 일하는 기간을 늘리는 동안 나는 감정적으로 많이 지쳤다. 뭐랄까- 행복의 요소들이 대거 소거된 느낌.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고 바라던 나의 모습과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 시간에는 '내'가 없었다. 삶은 어느새 ‘산다’기보다 ‘견디는’ 것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그것이 주-욱 내가 삶을 대해온 방식이었다는 걸.












이따금 살고,

대개 견딘다.


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학기를 거듭할수록 더 거대한 무기력만 각인시키던 대학을 꾸역꾸역 졸업했고, 아무리 애써도 흠집조차 나지 않던 마초 문화의 은근한 따돌림을 견뎠다. 첫 직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업무량으로 저녁과 주말을 고스란히 반납하고도 별 수 없이 '노력'했고 공공연한 성희롱도 굳은 얼굴로 지켜보기만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시간을 버티게 했던 변명은 우습도록 사소한 것들이었다. '내'가 아니라 '사회적 통념'을 기준으로 한 핑계들.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 그 마음을 부끄러워했다. 해내지 못하는 건 나의 모자람이라고 생각했다. 불합리까지도 견뎌내야 할 '업무'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다들 그런 거라고 했으니까. 멍청한 일이었다. 그게 싫어서, 더 이상 버티는 삶은 살지 않겠다고 한국을 떠났는데 어쩌다 보니 또 아득바득 버티다 왔다.


정해진 끝이 없었더라면 더 일찍 뛰쳐나왔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자의로 선택한 출구 없는 스트레스에 갇혀 깨달은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변하지 않는 '나'였다. 심약한 나를 감추려 함으로써 나는 가장 가혹한 동시에 나약한 인간이 되었다. 친구는 바보짓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것이 나였다. 어디에서 무엇을 해도 변하지 않는-.


당장 내일 비슷한 상황에 던져진다 해도 나는 병 같은 성실로 다시 나를 갉아먹을 거다.


사는 일과 견디는 일의 균형은 어디쯤일까.

나는 언제쯤 스스로에게 최선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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