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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Oct 06. 2015

운명이거나 우연이거나

낭만이 절박한 염세주의

예약해둔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간이터미널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정류장으로 빠른 걸음을 하던 참이었다. 뒤편 빵집의 자동문이 열리고 문간에 서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던 것 같다. 고개를 갸웃했으니까.




50분인 줄 알았던 차는 정각에 온다고 했다.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번엔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맞는 것 같은데.. 아닌가


빤히 바라보는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짓더니 묻는다.


-저기 성함이..?


과도한 치레에 피식 웃음이 났다.


이름을 묻고 싶으면 그 쪽 이름을 먼저 말하는 게 순서 아닌가요?


일부러 날을 세워 되물었는데 개의치 않고 제 할 말만 한다.


-아아. 맞는 것 같은데. 맞? 너 나 알지?


대뜸 반말. 이젠 슬슬 알 것도 같은데 끝까지 제 이름을 말하려 들지 않는 그 애가 얄미워졌다.


아니, 먼저 소개를 하는 게 맞지 않느냐고요.

-저기 사장님 딸 이잖아. 전화해보면 알겠지.


기어코 핸드폰을 꺼내 든다. 그 행동이 밉살스러워 찰싹 등짝을 때렸다.


야, 그냥 이름 말하면 되지. 이러다 모르는 사이면 어쩌려고 그래?


그 애가 멋쩍게 웃었다. G는 무려 초등학교 시절 친구다. 얼핏 헤아려봐도 못 본 지 13년이 넘었다. 버스가 오고 제 자리가 아니라며 우물쭈물 대는 그 애를 내 옆자리에 앉혔다. 적어도 4시간은 걸리는 여정에 길동무가 생겼으니 이것도 괜찮다 생각했다. 지난 10년간의 근황은 접어두고 '어떻게 이렇게 만나느냐'고 놀라워했다.


-운명..

중얼대는 그 애 말을


우연 한 번 기가 막히네.

로 덮으며 웃었다.









화제는 영화, 음악, 여행과 3포·5포를 거쳐 N포라  일컬어지는 우리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수시로 넘나들었다. 창에 난 빗자욱을 손가락으로 더듬느라 산발적인 대화가 끊어지기도 했다.  


잠시 묵이 흐른 후 최근 본 영화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하드 보일드'와 '멜로'라는 새삼스러운 장르를 인상 깊게 어우른 영화였다. 나는 위태롭고 쓰라린 그 영화가 꽤 마음에 들었지만 별 시리 아름답지도 않은 세상에 어두운 영화는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막 마친 참이었다.



-세상은 원래 아름답지 않아.

그건 그래. 난 벌써 옛날에 염세주의에 찌들었어.


-.. 나는 염세보다는 낭만주의자야.

나도 그래.

-넌 염세주의자라며.

그러니까, 바보야. 염세주의자가 낭만주의자인 거야.

-어떻게 말이 그렇게 돼?

세상이 아름답질 못하니까 낭만에, 사랑에 더  절박해지는 거야.

-그렇게 일맥상통하나?

글쎄. 나는 그래.



G는 잠자코 생각에 빠졌다.





나는 극단적 로맨티시스트다. 끊임없이 삶을 미워하면서도 사람과 사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죽음으로 귀결되는 사랑 이야기를 동경했고 '죽을 만큼' 간절한 사람을 만나기를 고대했다. 구원이 아니어도 괜찮다. <영원한> 사랑도 <변하지 않는> 마음도 믿지 않지만 <죽을 만큼>이 아니면 시시해.







한 차례 휴게소에 들른 다음 G는 잠들었고, 나는 창문을 열고 손 끝에 닿는 바람에 감각을  집중했다. 손 끝만큼 예민한 감각도 없다지. 버스는 예고되었던 시간보다 30분 더 늦게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전화해' 한 마디를 남기곤 뒤도 안 보고 돌아섰다. 우연이든 운명이든 인연이든 모든 관계에는 노력이  가장 절실하다. '다음에 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존재 할 '다음'이라면 기약하지 않아도 만나게 되겠지. 나에겐 노력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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