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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Feb 13. 2017

방관자의 참회

A Long Way Home (Lion, 2016)


거대한 감정 앞에 서면 너무나 당연했던 일들이 부자연스러워진다.


가령- 숨을 쉬는 것.


하나에 들이쉬고

둘에 내쉬고

셋과 넷에 멈춘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한 김 식히기 위해서다.

넘치면 폭삭 무너질 것 같고, 아마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조금 과하게 스스로를 타인에 대입하는 경향이 짙고, 자주 감정과잉에 빠진다. 공감성 수치와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추측한다. 라이언을 보면서는 러닝타임 내내 슬픔에 잠겨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두통을 얻었다. 흘러내리지 못한 것들이 속에서 울렁거렸다. 무어라도 게워내고 싶었다.



<슬럼독 밀리네어(Slundog Millionaire, 2008)>



공교롭게도 꼭 일주일 전에는 <슬럼독 밀리어네어(Slundog Millionaire, 2008)>를 봤다. 퀴즈쇼인가, 하고서 미루고 미루던 영화를 무슨 바람이 불어 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슬람교도의 폭동에 엄마를 잃고, 길바닥을 전전하고, 파렴치한 어른의 손에 붙들려 이용당하고,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이고,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의 손에 죽는. 어디선가 꼭 일어나고 있을 법한 현실을 고스란히 담은 이 영화는 너무나 그럴듯해서 아프기까지 했다. 가난한 짜이 왈라인 자말이 어마어마한 상금을 딸 수 있었던 것은 D. It's written 인지 몰라도 그가 답을 알게 되기까지 겪어온 모든 것은 무섭도록 현실이었다. 팩트 폭격을 맞은 듯한 참담함이 몰려왔다.








호주로 입양되기 전까지 사루의 생활도 위험천만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일까,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가족을 찾는 지난한 과정도 눈물겨웠지만 사랑하는 인도의 열악한 현실에 더욱 마음이 찢어졌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어도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는(도와줄 수 없는) 곳,

집 잃은 수많은 아이들을 위한 제대로 된 제도나 수단조차 갖추지 못한 곳,

그리하여 거리의 아이들이 넘쳐나는 곳.


가족의 품으로부터 유리(遊離)된 사루는 새로운 가정으로 인도되기까지 끊임없이 위험으로부터 달리고 도망친다. 그 조그만 것이 가느다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구두의 이름을 부를 때, 서슬 퍼런 남자들에게서 벗어나고자 절박하게 달릴 때, 조바심치는 발자욱 따라 여리디 여린 어깨가 흔들릴 때, 타닥타닥 좁은 보폭의 뜀박질이 바닥과 맞부딪힐 때마다 심장이 아리고 목이 메었다.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당겨 품속에 끌어안고서 괜찮아, 괜찮아 다독여주고 싶었다. 시시때때로 밟히는 날카로운 위험들로부터 번쩍 안아 올려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스크린 밖의 나는 다만 미래 방관자에 불과했고 슬픔과 무력함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먼지로 새까만 발이 눈에 밟힐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참을 수 없이 그리워서, 저리도록 꼭 안아주고 싶어서 와르르 눈물이 내려앉았다. 짙고 깊어 헤아릴 수 조차 없던 어린 눈동자들이 우수수 스쳐갔다. 같잖은 도덕성과 부족한 논리로 줄 수 있는 도움조차 주저했던 과거의 내가 참을 수 없이 한스럽고 부끄러웠다. 손을 오므려 입에 갖다 대는 시늉을 하던 아이들, 그 작은 손들 끌어다 밥 한 끼라도 사 먹일걸. 무어가 그리 대단해서 '사달라는 거 멋대로 다 사주고 그럼 안돼요' 잘난 척 못을 박았을까. 그저 어린아이 일 뿐이었는데. 마음 한편이 숭덩- 베어나간 듯 헛헛했다. 가장 가까운 현실에서도 나는 방관자다.






영화가 허물어뜨린 타인의 경계에 대해 생각한다. 인도에서 만났던 아이들이라면 크게 세 분류가 나뉘어 떠오른다. 쉽게 외면할 수 있는 죄책감이던 거리의 아이들과 쪼르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와 안기던 나의 작은 친구들. 그리고 지난 삶과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해 들은 사루와 자말. 과거의 나는 가뜨에 앉아 머리를 땋아주던 작은 친구들을 사랑했으나,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흙바닥에 허술한 천막을 두른 집에 이끌려 들어갔을 때도 (크게 놀라지 않은 척하려 애쓰며) 그저 어렴풋이 짐작하는데 그쳤다. 우리는 뜨거운 태양을 피해 신전으로 숨어들고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키득댔으나 정작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머물면 만나고 떠나면 잊히는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관계. 나는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물은 적이 없다. 해결해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춰내고 싶지 않음이라 둘러댔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기심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루와 자말을 통해 마주한 아이들의 현실은 상상 이상의 무게로 다가왔다. 과거의 나는 알량한 윤리의식 따위로 으스대는 대신 그 여린 것들을 안아주었어야 했다. 사루와 자말의 삶에 대한 공감과 슬픔, 연민이 내 작은 친구들을 떠올리게 했고, 마침내는 길을 지나며 마주쳤던 수많은 실루엣마저 불러내었다. 하나하나가 품고 있을 미처 전할 수 없던 사정들이 송곳처럼 흩어졌다. 영화가 보여준 이야기를 통해 그들은 스치는 타인이 아닌 개개의 인격체가 되었고 그제야 나는 그들에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무심해서는 안되었다.












나는 (아직도) 유토피아를 꿈꾼다



사루가 살아남은 것은, 그리고 가족을 찾은 것은 천운이었다. 그렇게 밖엔 말할 수 없다. 그 조그만 소년은 인식하지도 못한 채 얼마나 많은 위기로부터 달려 나왔던가. 또 그처럼 빠져나오지 못한 아이들은 얼마나 많을까.


나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해내지 못할 것을 (실은 마음속 깊이) 알면서도 여태 그만두지 못했다. 인간이 축척한 부와 식량, 노동력과 자원은 충분하고 우리 모두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욕심만 사라진다면 말이다.


나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직업의 귀천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각자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것에 따른 적합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면. 직업이 다만 자아실현의 도구가 되고 누구도 '먹고사는 일'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면. 생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저 '지금'에 충실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부'를 축적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그리하여 모두가 사람다운,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면. 저 여린 것들이 배를 곯지 않아도 된다면. 따뜻하고 안전한 품 안에서 보살핌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세상을 구하기엔 처량하리만치 작은 그릇임에도, (염치없이) 거대한 꿈을 꾼다. 웹툰 <로렌스를 구해줘>에서 작가 강형규는 상류 기득권(재벌 권력)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누구나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실현은 어디까지나 돈 있는 양반들에게나 (그것도 만화 속에서나 공공연하게) 가능한 이야기고, 어쩌면 가난한 나는 죽는 날 까지도 밥 한 끼 사 먹이는 것 밖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을 잊지 않고 살면, 그것이 이상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도달하지 못한들 어떠랴, 배곯지 않는 하루를 줄 수 있다면. 눈에 어른거리는 얼굴을 얼른 훔쳐내면서 더 이상 방관, 외면, 혹은 관람하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했다. 그래, 올해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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