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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Sep 21. 2017

포플러


할아버지 집에선 벽의 두 면이 커다란 창인 3층 끝 방에서 지냈습니다. 새벽부터 해가 비스듬히 들어오기 시작해 하루 종일 밝고 따뜻한 아늑한 방이었습니다. 그 방 맞은편에는 포플러가 길게 두 줄 늘어서 있었는데요, 이십 미터가 훌쩍 넘는 키다리 포플러는 바람이 불면 여럿이 모여 꼭 하나처럼 움직였습니다. 하나, 둘, 셋, 넷이 모여 아무렇지 않게 하나가 되는 모습이 몹시 자연스러워서요, 처음 이틀은 그게 여럿인 줄도 몰랐다니까요. 그 풍경이 좋아서 나는 많은 시간을 창가에 앉아 보냈습니다. 미처 지루할 새도 없었어요. 눈부신 햇살이 얼마나 멋지게 어른거리는데요, 바람이 불면 사각사각 얼마나 간지러운 소리를 내는데요, 그 움직임은 또 얼마나 부드럽고 다정한데요. 슬쩍 기대서면 누구라도 토닥여 줄 것 같거든요. 그 잎사귀는 분명 따뜻할 거거든요. 홀린 듯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나도 하나가 되어 숨 쉬고, 부대끼고, 흔들리는 기분이거든요. 나도 나무도 바람도 사라지고 경계 없는 세계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어느 날은 달이 높이 뜨고서 창가에 앉았는데요, 갑자기 부닥친 그 하늘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숨이 다 막혀왔어요. 아랫집 작은 방의 불빛을 넘겨받은 포플러가 어스름 빛나고 밤은 맑고 저 멀리 수많은 별이 깜빡이고요. 서늘한 바람에 어깨를 흔드는 포플러 사이로 황홀한 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한없이 가벼워져 보드라운 가지 사이를 팔랑팔랑 헤매는 종이 인형이 됐습니다. 무심결에 시커먼 허공에 발을 내딛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두 발을 흔들어야 했어요. 발뒤꿈치가 까칠하고 차가운 건물 외벽에 닿을 때에야 잊고 있던 몸의 윤곽과 무게를 인식할 수 있었거든요. 포플러가 흐드러지며 아득히 손짓할 때마다 나는 ‘나’를 감각하는 일을 잊지 않기 위해 더 세차게 발을 구르고 손가락을 곰실거려 창틀을 움켜잡았습니다. 지금 걸터앉은 곳이 삼층 창틀 위임을, 내가 속한 곳이 중력의 영향을 받는 삼차원의 세계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요.


그 무렵의 나는 창가의 포플러 때문에 가장 두려워하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삶을 애착하는 일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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