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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Jan 18. 2016

유약한 바위

손대면 톡- 하고 부서집니다



나는 단 한 번도 강했던 적이 없다




유년시절을 거슬러 찾은 마지막 기억 속의 눈물은 4살 즈음이다. 처음 유치원에 가던 날이었던 것 같다. 익숙한 엄마의 품을 떠나 낯선 선생님의 품에 안기면서 나는 참 서럽게도 울었다.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꼬꼬마 시절과 학창 시절을 통틀어 나는 결코 울지 않는 아이였다. 짓궂은 놀림에도, 호된 매질에도, 억지 눈물을 강요하는 수련회의 마지막 밤에도, 친구들이 꺼이꺼이 통곡하는 슬픈 이야기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엄마는 잘못했다 빌지도 고개를 떨구지도 않는 나를 보며 차라리 울라며 소리를 질렀고, 친구들은 '피도 눈물도 없다'며 혀를 내두르거나 때로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날 나에겐 울지 않는 것이 곧 강한 것이었다. 나는 눈물로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이 넘도록 눈물을 집어삼켰다. 그 후엔 슬픔이 턱 밑까지 차올라도 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눈물이 약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우는 법을 잊어버린 후였다. 답답했다. 어린 삶도 제법 무겁고 힘들었으나 우는 법을 잊은 나는 눈물로 그 고단함을 덜어낼 수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어떤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란, 나를 밀어붙이거나 그저 견뎌내는 일이었다. 아파도 슬퍼도 힘들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겨울이면 옷을 껴 입는 대신 살을 에는 바람에 나를 내던져 익숙해질  때까지 굴렸다. 그것이 나의 생존법이었다. 하기 싫은 일, 잘 할 수 없는 일에도 늘 열심이었다. 주어진 의무에 최선을 다했고 적어도 ‘성실’하다는 사실에 자부했다. 그렇게 묵묵히 견뎌내는 일에야 말로 특화된 종류의 인간이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자기 위안이었지만 한 때는 그것을 강하다 생각하기도 했다.










한국, 정동진 (2010)






나는 약했다. 그래서 강한 것에 집착 했다. 강하고 싶었다. 세상을 구할 영웅은 못되어도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속이 아무리 부서지고 망가져도 비치는 나는 굳건해야 했다. 그러니까 나는 짧은 일생을 내구성 제로의 거대한 모래성이었던 거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은 하나씩 바뀌었다. 누가 뭐라든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그만 둘 용기가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무뎌지게 하는 대신 날카롭게  갈고닦아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었다. 피하고 보호하고 숨기고 감싸안는 게 아니라 소리치고 싸우고 바꾸고 쟁취하는 것. 수긍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 강한 인간의 태도였다. 단단하고 짙어지는 것이 강함이라 생각지만, 실은 투명하고 유연 해지는 것이 강함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나는 다시 울 수 있게 되었다. 연민과 공감, 슬픔을 눈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제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다. 나는 약하다. 한없이 약해 시도 때도 없이 부스러지고 흘러내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약함을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강해질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약하고 이전보다 아주 조금 더 강하다.















나는 잘 부서집니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 없이도 일어설 수 있어요. 설명할 수 없는 우울이 덮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자가 치유의 능력이 생겼거든요. 넘어진 후엔 일어날 수 있고 부서진 뒤엔 부서진 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망가지고 찌그러진 모습이 새로운 내가 됩니다. 멋지지 않아요? 나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고 또 다른 나를 받아들입니다. 매일 다른 나를 살아요. 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느려도 좋아요. 이 모든 것이 내게 주어진 아름다움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느림은 세상 모든 것을 찬찬히 볼 수 있게 하는 태생적 유리함입니다. 쉽게 부서짐은 다른 부서진 것들을 쉽게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점점 더 약한 어른이 될 거예요. 작고 작게 부스러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이 될 겁니다. 결국엔 고운 모래가 될 테요. 길들지 않는 한 줌 모래요.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무엇도 나를 잡을 수 없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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