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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Feb 22. 2016

딸들의 연대

엄마 같은 엄마, 엄마 같은 딸이 될 수 있을까



좁은 길을 타고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


'할머니-'









엄마만큼이나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수화기 너머로 '잘 지내고 있니' 조심스럽게 물어보던 할머니. 엄마의 엄마.


가까이 살고 있음에도 명절에나 찾아뵙곤 했는데 그나마 이번 설에는 그러지도 못했다. 오늘 아침, 엄마는 전화를 걸어와 저녁엔 할머니 댁에 가자고 했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할머니 때문이었을 거다. 어쨌든 할머니 뵈러 가야지 생각하고 보니 마음이 들떴다.


집에서 할머니 댁까지는 차로 고작  15분. '할머니-'하고 불렀더니 뜻밖에도 본채 대신 오른 편의 황토방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와 먼저 나를 반긴다. 부스럭 부스럭 이불 걷는 소리가 들리고 곧 창호를 바른 문이 열렸다. 수많은 겨울을 지나며 하얗게 주름진 할머니는 반가운 얼굴로, 느린 걸음으로 나를 맞아주다. 손을 꼭 잡았다. 추우면 손해라며 다섯 겹, 여섯 겹을 껴 입은 할머니는 이젠 나보다도 작다. '할머니-' 하며 껴안았더니 팡팡한 옷이 느껴진다. 그렇게 옷을 껴 입었어도, 할머니는 작은 나보다도 작다. 잘 다녀왔어요 속삭이듯 말했더니 주름지고 창백한 얼굴이 따뜻하게 웃었다.




잠시 우리를 지켜보던 엄마가 차로 달려갔다. 조수석에 실려 있던 목도리를 꺼내어 들고 씨익 웃어보인다. 기쁘고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엄마 하나, 나 하나, 큰 언니 하나, 작은 언니도 하나.'


까만 토끼털 목도리가 네 개. 다짜고짜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벗겨내는 손에 할머니는 잠자코 목을 맡긴다. '예쁘지?' 물으니 '따뜻하네'하는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선물을 받은 할머니보다도 선물을 하는 엄마가 더 기뻐했다. 엄마와 엄마. 그러니까, <엄마>와 <엄마의 엄마>. 엄마와 할머니. 바라보고 있자니 익숙한 모습이 겹쳐졌다.

까맣고 따뜻한 네 개의 토끼털 목도리를 두른 할머니와 엄마와 엄마의 언니들. 엄마와 이모들. 엄마와 딸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피식 웃었다.















차 안은 조잘조잘 이야기로 가득했다. 할머니는 볼멘소리를 하셨다. '남자들은 뭐 시켜놓으면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장을 보라고 보냈더니 할아버지가 엉뚱한 것만 잔뜩  사 온 모양이었다. 세월이 그만큼 지나도 남자들은 어쩔 수 없나 보다고 키들키들 웃으면서 기분이 묘했다.


할머니 집에 가던 길보다도 오랜 시간을 달려 식당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고서 나는 숟가락을, 엄마는 젓가락을 집었다. 나는 '할머니-엄마-나-동생' 순으로 숟가락을 놓고, 엄마는 '할머니-동생-나-엄마' 순으로 젓가락을 놓았다. 조금 놀랐다. '저것이 엄마의 순서구나' 문득 깨달았기 때문에. 엄마는 자신보다도 우리를 앞에 두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미안해졌다. 


엄마는 할머니 앞 쪽으로 작게 자른 고기를 밀어 두고, 나는 그런 엄마에게 쌈을 싸 건넸다. 나는 엄마를 챙기고,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챙기고. 할머니는 또 본인대로 딸과 손녀들을 챙기느라 바쁘셨다. 딸은 엄마를 챙기고, 엄마는 딸을 챙기고. 


직원이 가져다준 여분의 양파절임은 나에게서 동생을 지나 할머니에게 전해졌다가 엄마를 통해 다시 돌아왔다. 이런저런 채소며 고기며 반찬들이 상을 엇갈려 지났다. 웬일인지 먹는 것 보다 서로 나누어주고 덜어주고 챙겨주기가 더 바빴다. 서로를 향하는 손길들이 상 위를 바쁘게 엮었고 돌고도는 음식을 눈으로 좇다가 결국엔 으하하 하고 웃었다.


겨우 삼대(三代)의 딸일 뿐이었으나 왠지 할머니의 엄마도, 그 엄마의 엄마도 한 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엄마였고, 또 딸이었다.  맞은편에 있는 할머니와 엄마는 모녀 같기도 했고 이따금 자매처럼 보이기도 했다.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은 얼굴들을 마주하고서  얽히고설킨 밥상은 거대한 딸들의 연대를 이루었다. 엄마도 딸도, 엄마와 딸이기 전에 인간이었으므로 또한 거대한 인간의 연대이기도 했다.





엄마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늙어 갈까?


궁금해졌다. 언젠가 나도 엄마에게 엄마 같은 딸이 되어줄 수 있을까? 추운 겨울이면 꼭 같은 목도리를 둘러주곤 따뜻하다는 말에 팔짝 뛸 만큼 기뻐하는- 그런 딸이? 확신할 수 없다.




문을 나서며 할머니는 엄마 몰래 내 손에 용돈을 쥐어주셨다. 본인 딸 마음 고생만 시키는 딸의 나쁜 딸에게. 한사코 거절해도 이런 일에 있어서만은 이상하리만치 완강하시다. 할머니, 이젠 제가 드려야 될 나이인데요.  말하면서 밥벌이도 못하고 있는 나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했다. 기어코 쥐어주시는 용돈을 받으면서 멋쩍게 웃었다. 고작 그게 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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