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비니(Lumbini)에서 열흘
룸비니(Lumbini)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으로 인도의 불교 성지 네 곳 중 하나다. 룸비니의 국제 사원 지구에는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사원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모여있는데, 그중 한국사찰인 대성 석가사에서는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방을 얻어 지낼 수 있다. 겨우 열흘을 지냈을 뿐이지만 나는 그곳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무엇이 좋았느냐고 하면, 책상이 있어 좋았고 나비가 많아 좋았고 풀소리가 들려 좋았고 조금 지루해 좋았고 그럼에도 심심하지 않아 좋았다. 무엇보다 조용하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 사찰에는 많은 종류의 소리가 부재했다. 요란한 엔진이나 클락션, 목청 좋은 사람들이 부대껴 만드는 도시의 소음, 열 발짝에 한 명씩 들러붙는 호객꾼의 끈질긴 권유, 마음을 어지럽히는 음악 같은 것. 이따금 풀벌레가 삑삑, 새가 깍깍 울었고 저 멀리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그 곳의 풍광을 떠올리면 따뜻하게 녹은 초콜릿을 끼얹은 것처럼 마음이 노곤해진다. 사분사분 숨죽인 소리로 채워진 하루는 지루하고 고요해서 아주 편안했다.
_아침
절에 있는 동안은 별달리 할 일이 없었다. 일찍 눈을 뜨고도 밤새 식은 물이 햇빛에 데워지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침대에서 뒹굴었다. 문을 나서면 알전구 아래로 죽은 날벌레가 까맸다. 청소하는 사람들이 성긴 비로 사각사각 수천의 시체를 훑어갔다. 샤워실로 가는 늦은 아침의 돌바닥엔 개미가 유난히 많았다. 땅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갈지(之) 자로 걸어 허름한 공용 욕실에 들어가면 불청객에 놀란 벌레들이 우왕좌왕 기어 나왔다. 여태 벌레를 보고 비명 지를 때마다 사람들은 '네가 쟤보다 훨씬 커. 쟤네가 널 더 무서워해'라고 했다. 그러나 경험한 바로는 내가 벌레보다 몸집이 큰 건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벌레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고, 내가 작은 것을 겁내는 이유는 아차 하는 사이 그것을 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_낮
어제 입은 티셔츠 따위를 물이 흥건한 채로 빨랫줄에 널어두고 나면 뜨거운 낮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바깥에 앉아 있으면 금세 얼굴이 달아올랐고, 가만히 있어도 목 언저리가 끈적해졌다. 덜 마른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매고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가 종이 치면 휘적휘적 걸어가 밥을 먹었다. 인터넷이 없는 생활은 발 닿는 공간만큼의 범위로 축소된다. 물통 어디까지 개미가 기어오르는지, 보리수 잎사귀는 몇 번이나 방향을 바꿔 팔랑이다 땅에 닿는지- 그런 걸 유심히 바라봤다. 못 견딜 정도로 날이 뜨거워지면 방으로 돌아와 책 읽다 글 쓰다 깜빡깜빡 낮잠을 잤다. 딱딱한 침상에 드러누워 제목도 가수도 기억나지 않는 노래의 한 구절을 반복해 부르기도 했다. 놀랍도록 울림이 좋은 방이었다. 그러고도 저녁이 멀면 창 밖으로 보이는 절의 한 조각을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어슬렁어슬렁 거닐며 춤을 췄다. 따끔할라치면 모기가 옷을 뚫고 피를 빨고 있었고 하는 것도 없는데 자주 배가 고팠다.
_저녁
좋아하는 소리,라고 하면 단연 불당에 울리는 불경 소리를 꼽는다. 어스름한 촛불과 거꾸로 꽂힌 전등이 어둠을 미세하게 물리는 저녁이면 소리가 더욱 깊어진다. 공간을 확장하며 퍼져나가는 불경 소리에 귀 기울이면 시간이 붕 떠올라 아득하게 사라지는 것 같다. 서로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취향을 가진, 크거나 작고 높거나 낮고 가늘거나 묵직한 목소리들이 손깍지 끼듯 맞물려 떠오르는 순간. 각각의 소리는 자그만 빛으로 시각화된다. 창백하고 선명한 빛이 무릎 꿇고 앉은 사람들로부터 포롱포롱 피어나 공중으로 떠오르고 파앗, 한순간 환희 내지르듯 밝아졌다가 어떤 궤도를 따라 회전하며 구를 만든다. 그것은 제멋대로 반경을 넓혔다 좁혔다 하며 공명하고 속으로 깊거나 밖으로 넓은 소리의 높낮이를 만들어낸다. 소리가 만들어낸 진동하는 공간 안에서 팔다리는 무게를 잃고 부유한다. 동서남북도 위도 아래도 사라지고 그저 깊고 따뜻하고 모호한 공간이 주변을 덩그러니 감싸 안는다. 그 속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으면 머리와 발이 뒤집어지고 나는 상상 속 무중력에 빠진다. 소리들이 만든 또 하나의 세계다. 그 속에서 몸은 평소와 다른 밀도를 느낀다. 공기를 통해 전달되는 소리가 아닌 소리를 매개로 존재하는 세계. 나는 떠오른다. 부유한다. 익숙한 세계를 이탈해 조금 다른 각도로 굴절된 세계를 만난다. 낯설게 일렁이는 소리의 구가 몸을 감싸고 일순간 익숙한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알 수 없는 것에 경탄한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쉼 없이 반동하던 상념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낀다.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어떤 막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 단절되어 안전하다는, 비현실적인 착각에 잠겨있다 조금 넋이 나간 채 땅을 닫지 않고 걸어 방으로 돌아온다. 그 시간은 내가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다. 세계로의 이동이다. 다른 밀도의 세계에서는 시간 또한 다른 각도로 굴절한다. 구부러진 시간을 지나 다른 속도, 다른 무게, 다른 감각으로 세계와 닿는다. 떨어지는 낙엽처럼 천천히 현실로 돌아온다. 가볍고 산뜻한 착지다.
_밤
예불이 끝난 후, 찬물에 후다닥 샤워하고 나면 어느새 하루가 끝나 있다. 대략 일곱 시. 남은 것은 머리 위 거대한 팬과의 싸움이다.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방의 천장에는 미풍이나 약풍이나 속도를 조절할 수도 없고, 그저 스위치를 올리면 요란하게 돌아갈 뿐인 거대한 팬이 있었다. 그걸 켜는 순간 이전에 존재하던 소리는 죄다 사라진다. 소리는 더 큰 소리의 피식자(被食者)가 된다. 팽팽팽, 회전하는 날을 따라 정신도 말려 올라간다. 팬을 켜면 맹렬하게 회전하는 공기와 소음에, 끄면 더위에 시달려 내도록 잠을 설쳤다. 그래서 그런가, 룸비니에서는 온 밤이 길고 긴 꿈이었다. 점 같은 꿈으로 점철된 밤들. 길고 긴 꿈속에서 어느 날은 디저트를 왕창 먹었고 다음 며칠은 잊고 있던 사람을 잔뜩 만났다. 온 밤을 꿈으로 헤매고 나면 어쩐지 지난 하루가 끝나지 않은 채 늘어지는 것 같다. 그렇게 여러 날을 이어 붙여 룸비니에서의 나날은 길고, 길고, 긴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다.
어떤 장소 고유의 리듬을 찾는 데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채식에 익숙해졌지만 더위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고, 하루를 혼자 보내는 일과 지루함을 즐기는 일에 빠르게 능숙해졌다. 일요일엔 밀린 빨래를 했고, 책을 많이 읽은 월요일은 조금 지루했다. 일찍 깬 수요일엔 어쩐지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풀어둔 짐을 꾸렸다.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사이, 정류장 지천의 거대한 쓰레기 더미 속으로 나비가 날았다. 아름다웠다. 기억의 일부는 특정한 장소에 유착되어 남겨진다. 장소에 깃든 기억의 조각은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찾을 수 있다. 또 하나의 ‘나’와 ‘기억’을 남겨두고 가는 길. 덜걱덜걱 버스가 달리는 소리, 탁- 나무 도마 위로 둔탁한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 달달달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 잘그락 잘그락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 그 모든 게 너무도 조화로워서 슬몃 웃음이 났다. 언젠가 돌아오는 날, 그대로 떠오를 테다. 그때가 오면 남겨둔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이 곳에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