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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Nov 03. 2017

비법은 서두르지 않는 것

함께 먹어서 식구(食口)라잖아요


이따금 소외되지 않기 위해 관계를 떠난다. 바쁜 일을 만들기도 하고 핸드폰을 끄고 잠수를 타기도 하지만 여행을 떠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원치 않는 관계로부터 단절될 권리’라고 허울 좋게 포장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타인의 감정과 행동에 휘둘리는 게 싫어서, 혹은 누군가에 의지하는 일이 두려워서 하는 도망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나선 여정에선 어쩐지 높은 확률로 좋은 사람을 만나고 만다. 아이러니하다.


이번에도 그랬다. 가로등 하나 없는 돌길을 한참 올라가면 불안해질 무렵 뜬금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외진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먼저 난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고 채 하루가 되지 않아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 나는 작은 저항 한 번 못하고 속절없이 '함께'가 주는 안정감에 빠져들었다.






아침이 오면 사람들은 부스스 일어나 손을 번쩍 들고 ‘좋은 아침!’ 외쳤다. 하나, 둘 눈곱을 떼고 어기적 어기적 모여들면 티 타임이 시작됐다. 작은 전기 포트에 물을 끓여 차와 커피를 마시며 시답잖은 이야기로 깔깔 웃어 잠을 깨웠다. 그러고 나면 어느 순간 흩어져 각자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거나, 못 잔 잠을 더 자거나 했다. 더러 누군가 '하고 싶은 게 생겼어' 외치면 우르르 몰려 나가기도 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한다. 그 단순한 지침을 따르자니 세상에 못할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소한 일에 열심히 즐거워하고, 별거 아닌 일에 크게 웃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해가 지면 별을 보고, 볕이 좋으면 빨래를 했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돌보고, 계획적으로 게으름을 피우면서 우린 다른 건 몰라도 웃는 거 하난 참 잘한다며 기뻐했다. 여유와 웃음이 넘쳤고 모두가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했다. 어쩌다 실수를 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까 봐 조바심 내거나 안달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남과 비교하거나 내가 아닌 것이 될 필요도 없었다. 누구도 사회의 기준을 잣대로 스스로와 타인을 평가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마음껏 지루하기, 나에게 충실하기. 그런 걸 목표랍시고 세웠다. 틈만 나면 머리를 맞대고 꿈을 나눴다. 누구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우리는 비슷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옹기종기 겹쳐 앉은 어깨의 온기가 좋아서, 고개를 숙이고 풋- 웃곤 했다. 몸 속 깊은 곳에서 움찔움찔 새는 웃음 때문에 마음이 자주 간지러웠다. 이부자리에 누워 생각했다. 생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선물을 준비해 놓은 걸까? 사람은 혼자이기 때문에 함께 산다, 는 말을 자주 되새겼다.





저녁엔 다같이 소매를 걷어 붙이고 밥을 했다. 칠이 벗겨진 프라이팬 위에 재료를 익히고, 가닥가닥 들러붙은 면을 떼어내고, 날이 무딘 칼로 양파를 다졌다. 요리는 팔 할이 기다림이었다. 우리는 뜸이 들기를 기다리며 노래를 하고, 춤을 췄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만들면서 열심히 먹고 즐겁게 사는 일은 이런 기분이구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를 외롭지 않게 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이런 거구나, 깨달았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사는 건 약한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안전한 느낌이었다.


나는 곧 하루에 세 끼를 정성 들여 먹는 일을 사랑하게 되었다. 맛있다, 맛있다, 맛있다고 숟가락을 놓을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는 일을, 가스불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국이 끓기를 기다리는 일을, 신선한 야채를 고르는 일을, '오늘은 뭐 먹지-' 고민하는 일을, 손톱을 세워 마늘을 까는 일을, 계란을 톡톡 깨어 넣고 정성스레 휘젓는 일을, 유심히 냄비 속을 들여다보는 일을, 한 시간이 넘도록 부엌을 서성이는 일을, 다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일을, 그리하여 마침내 이 순간을 살아내는 일을 사랑하게 되었다. 꿈같은 현실이었다.



비법은 서두르지 않는 것



비법은 서두르지 않는 것, 이라고 했다. 꼭 음식에 국한되는 말이 아니다. 삶이 가진 모든 다채로운 순간을 대하는 비법이 그랬다. 우리는 잘 웃고 잘 울었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했다. 맛있게 먹고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아름다운 것에 감탄하고 매 순간 진심을 다했다. 감사를 잊지 않았고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비법은, 서두르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 더 먹을까' 고민하면 '하나 더 먹으면 배불러서 행복할 거야.'하고 답했다. 일찍 자면 내일 아침이 개운해서 행복할 거야. 화장실 가면 시원해서 행복할 거야.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 맛있어서 행복할 거야. 새 모자를 사면 새 모자가 생겨서 행복할 거야. '그래서 행복할 거야, 그래서 행복할 거야', 자주 말했다. '그래서 행복할 것 같은 일'들을 하며 지냈다. 어느 날은 지난 일주일 무얼 했던가- 곰곰 돌이켜 봤는데 맛있게 먹고 눈물 나게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옹기종기 모여 밥을 먹고 옥상에 누워 별을 본 게 다였다.


맨발로 흙이 풀풀 날리는 거리를 거침없이 헤집었고 경쟁이라도 하듯 꼬질꼬질했지만 꾸미지 않은 모습이 부끄럽지 않았다. 매일 가장 말간 얼굴로 서로를 마주했다. 그 속에서 나는 내가 아닌 것일 필요가 없었다. 나의 철없음이나 모자람, 대책 없음 또한 나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적어도 이 사람들 앞에서는 내가 부정당하거나 재단되거나 평가받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성별이나 나이, 학교, 직업, 지역 등 심심찮게 나를 규정짓던 조건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개인으로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공동체 생활이 이럴까, 상상했다.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을 식구(食口)라고 부른다고 했다. 누군가의 손으로 지은 끼니를 나누어 먹는 일은 단편적으로 같은 공간과 시간과 음식을 공유하는 것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먹는 일이 사는 일이라면, 함께 먹는 일은 곧 함께 사는 일이 아닌가. 그 사이에서 신뢰와 애정, 동지애 같은 것이 움트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그들과 함께였던 시간은 타인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일에 관한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후에 나는 먹는 일과 사는 일, 그리고 '함께' 사는 일과 그 속에 얽혀 있는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인간의 행복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 행운보다 심리적 안정감에 많은 부분 의존한다. 신뢰할  있는 안정적인 유대는 개개의 존재가 가진 근원적 고독과 그에 따르는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상쇄시킨다. 결국 인간의 욕망이란 홀로 남겨지지 않고자 하는 몸부림 아닌가. 결코 혼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있다면, 돌아올 곳이 생긴다면. 삶은 한결 쉬워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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