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사나(Vipassana) 명상 체험기
인도의 가장 오래된 명상법 중 하나인 비파사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으로 2500여 년 전 보편적 괴로움에 대한 보편적 해결 방법으로 전파되었다. 종파적이지 않은 이 명상법은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여 인간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참가자는 10일간의 코스가 끝날 때까지 전체 기간을 수련장 안에서 지내며 살생, 도둑질, 성적 행위, 거짓말, 취하게 하는 물질을 금하는 다섯 가지 계율을 따른다. 수련생은 첫날부터 마지막 날 아침까지 침묵을 지켜야 하며 모든 형태의 의사소통(몸짓이나 수신호, 아이 컨택, 메모 전달 등)과 신체접촉이 제한된다. 코스 기간 중에는 다른 수행법과 종교적 의식을 삼가는 것이 권고되며 약물과 술, 담배뿐만 아니라 읽거나 쓰는 일, 음악을 듣는 일, 요가와 운동 또한 금지된다. 휴대폰과 기타 전자기기는 입소 시 운영진에게 위탁해야 하며 코스가 끝나기 전까지 편지, 전화, 방문객을 포함한 외부와 연락은 일체 허용되지 않는다.
비파사나는 자연스러운 호흡과 몸의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의 부정성과 정신적 번뇌를 직면하기를 격려한다. 수행의 연속성 유지를 고려하여 짜인 스케줄은 새벽 네시 기상을 시작으로 하여 새벽 두 시간, 오전 세 시간, 오후 네 시간, 저녁 두 시간의 명상과 담론, 면담, 질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상은 거의 모든 신체적 활동을 금하고 호흡과 감각에 집중하기를 요구한다. 쉽게 말하면, 하루 중 열한 시간 이상을 가부좌 틀고 앉아 오감을 죽인 채 오로지 호흡에 전념한다는 말이다. 이 시간은 예리한 인식으로 몸과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고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는 보편적 진리를 경험하는, 일명 '정화의 과정'이다. 다음은 열흘 간의 수련 동안 떠오른 생각을 기억나는 대로 재구성했다. 기억력이 난잡해 엉성하고 조악한 회상이 되었으나 아쉬운 것은 아쉬운 대로 흘려보내라는 것이 가르침이었으므로 부족한 최선에 만족하려 애쓰고 있다.
DAY 1.
-비파사나를 수행 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침묵과 단절을 걱정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나의 적이었던 적이 없다. 오히려 친밀하고 편안했다. 눈을 감고 다리를 차곡차곡 접어 앉아 들숨과 날숨을 지켜봤다. 육체의 고통은 시련이 아니고 침묵은 괴로움이 아니며 단절은 고난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사무친 것은 내가 얼마나 예민한 인간인가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바로 옆자리의 수행자는 어디가 불편한 건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목을 벅벅 긁으며 하품하고 크게 트림하고 온 몸의 관절을 꺾어 소리를 내는 틈틈이 옷자락을 부스럭 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와 공유하는 공간이 빈틈없이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을 신경 쓰지 않으려 무진 애썼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조심히 간수하지 않는 사람은 무례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리를 만든다. 공간의 기압차가 바람을 만들 때, 바람에 놀란 새가 날아오를 때, 새가 차고 오른 가지가 꺾어질 때, 떨어진 가지 위를 밟고 걸을 때, 심지어 가만히 앉아 숨을 쉬는 것으로도 소리가 생겼다. 입을 다무는 것뿐 아니라 존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소리를 살뜰히 보살피는 것이 침묵으로 가는 길이었다. 소리를 죽이자 존재가 선명해졌다.
-말은 파동의 형태로 형상화되어 어떤 형태로든 파문을 일으킨다. 그래서일까. 대개의 경우 말은 스트레스였다. 무엇이든 뱉어 놓고 나면 혹여 그 속에 편견이나 강요가 들어있진 않은지, 오만하거나 경솔하지는 않았는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지를 걱정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이따금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후회하는 데까지 에너지를 쏟았다. 피곤한 일이었다. 말하지 않는 하루는 그런 걱정을 덜어 한결 가벼웠다.
DAY 2.
-사람들은 금세 기척을 숨기는데 능해졌다. 조용히 숨 쉬고 가만히 움직이며 존재의 밀도를 낮췄다. 바로 옆 사람의 존재마저 깜빡깜빡 잊는 일이 잦았다. 눈을 감고 돌상처럼 앉아 자리를 지키는 시간은 영원처럼 느리게 흘렀다.
-또 하나 깨달은 것은 나는 도무지 침묵할 줄 모르는 인간이더라는 사실이다. 눈을 감아 바깥의 소란을 외면하고 입을 다물어 몸의 소리를 가다듬자 머리에서 온갖 잡념이 뛰쳐나와 요란을 떨었다. 마음을 벗어난 생각은 글자가 되고, 소리가 되어 혈관과 세포 사이를 휘저었다. 침묵은 단순히 ‘말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은 이제 그만둬야지'하고 생각하고, '생각이 곧 말이고 소리였구나'하고 말하고, '나는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인간이구나'하고 또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는 순간, 말하지 않는 순간, 그리하여 침묵하는 순간이 없었다. 너무 커져버린 생각들이 일으키는 소란을 무력하게 바라봤다. 아무리 애써도 침묵할 수 없다.
-침묵은 별도로 자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소리의 부재를 가리킨다. 부재는 존재로 치환되어 존립을 상실할 수 있으나, 반대의 경우는 불가하다. 그리하여 소리는 언제나 위협이나 강제가 될 수 있다. 존재를 지우지 않으면 부재는 존재할 수 없다. 언제든지 부재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힘, 소리가 가진 것은 존재의 권력이었다.
DAY 3.
-모든 것은 시간을 따라 흐르고 변화한다. 고잉카(비파사나 명상법의 스승, 그룹의 수장)는 사물의 일시적이고 불영속적인 특징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라고 했다. 동시에 찰나의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 변화, 그 자체를 감각하고 삶의 비참(Misery; 불행, 궁핍, 고통)을 인식하되 반응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삶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일 아닌가? 자극을 그대로 흡수하되 좋은 것을 갈망하지 않고 불쾌한 것을 회피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마치 스스로의 인생에서 물러서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과연 '나'의 인생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면 고통과 괴로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걸까. 욕심은 끝이 없고 욕망이 존재하는 한 비참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열망하지 않는 것', 열의 없는 삶의 추구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어쨌거나 내 삶은 충분히 무미건조하고 거기서 무엇을 더 빼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스로의 비참에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은 나의 결정이지만 그런 태도를 강요하거나 타인의 비참까지 관망해서는 안된다. 삶의 비참과 습관화된 개인의 부정적 사고 패턴을 점검하고 행복을 건조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다. 가령 비파사나를 수련할 수 있는 것은 코스에 참가하느라 열흘을 쉬어도 생계에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만큼의 여유가 허락된 사람만이 삶을 다르게 바라보려는 노력을 시도할 수 있다. 주변의 모두에게 비파사나의 수행을 권하라는 고잉카의 말을 듣다가 어느 날 무심코 다른 삶에 오만한 잣대를 들이댈까 봐 덜컥 겁이 났다.
DAY 4.
-다른 씨(seed)에서는 다른 싹이 난다고 했다. 삶의 모든 일은 각자가 뿌린 씨앗이 결과가 되어 돌아오는 거라고. 그러나 인생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사건들을 어디까지나 개인의 파종 탓이라고 말해도 될까. 외부의 사건을 특정 감정과 연결시켜 인식하는 것은 온전한 개인의 의지이자 선택이지만, 개성적 사건이 가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선한 의지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듯 지금의 불행은 과거의 잘못이나 죄, 카르마나 업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종류의 우연이 겹쳐져 만들어진 결과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무서운 건 개인의 비참을 각자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방관하는 일을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같은 사건도 다른 기질과 성향, 경험을 가진 개인이라는 알고리즘을 통과하고 나면 전혀 다른 결과로 도출된다. 누군가는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삶을 대하는 개인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의 차이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일전에 친구 A가 일어나야 할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면 더 잘 수 있기 때문에 기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런 사고방식에 감명받았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이 교훈적인 이야기를 친구 B에게 전했을 때, 잠자코 듣고 있던 그가 말했다. '넌 한 번 깨면 다시 못 자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에 앞서 A와 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다. 사건은 환경, 시기, 사람의 복합적 상호관계의 영향력 아래에 있고 동일한 사건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상이한 태도에서 각자의 사정을 간과할 수는 없다.
DAY 5.
-육체의 고통을 그저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관망하는 것은 문제를 치유하거나 개선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모든 욕망과 감정과 육체의 욕구가 제어 가능한 것이었다면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벗어나 자생할 수 있었겠지. 그러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해치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나(자아)'와 '나의 것(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했다. 확실히 '나'보다 유독한 것은 '나에 대한 집착', '소유'보다 유독한 것은 '소유에 대한 집착'인지도 모른다. 무언가에 대한 집착, 열망, 갈망이 좌절과 비참, 불행, 고통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인지도.
-담론을 들을 때면 비파사나의 수행 과정이 마치 신 없는 종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맹목적 추구와 믿음, 자신의 것이 옳다 말하는 아집과 (신 없는) 신자와 신전, 신앙이 있었다. 인류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되는 방책은 대개 전제로부터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 삶 전반을 돌아보는 기회이자 색다른 시도가 될 수 있으나, 인간사의 비참에 대한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해결책으로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DAY 6.
-의식(意識)적이고 의식(儀式)적인 침묵은 어렵지 않았으나 천정을 기는 도마뱀에게 무심코 인사하거나(도마뱀, 잘 잤니?) 빨래를 널다 콧노래를 흥얼거리거나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어깨를 들썩이지 않기 위해 정신을 곤두세우고 몸을 긴장시켜야 했다. 무의식과 습관의 영역에 가까운 행동을 제어하는 일에는 품이 더 많이 들었다.
-호흡은 기체의 교환인 동시에 세계와의 교류, 순환, 상호작용이자 교감이기도 했다. 연속적인 공기의 파동과 시간의 흐름, 세계와 몸의 변화를 들숨과 날숨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현재는 인식되는 순간 과거가 되었고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순간이 불명확한 기억으로 잔존할 뿐이었다. 무엇도 붙잡거나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지속적인 변화와 끊임없는 상실 속에서 느꼈다. 가진 적 없으므로 잃을 것도 없다. 손에 닿은 것이 손가락 사이를 스쳐 빠져가는 것은 순리였다.
DAY 7.
-알전구가 잔열로 발갛게 빛났다. 전구는 최소한의 빛만을 내도록 종이 갓으로 가려진 채 벽을 향하고 있었다. 명상 홀에는 언제나 형태를 겨우 분간할 만큼의 빛만 존재했다. 온종일 눈꺼풀만 바라본 눈이 침침했다. 하염없이 들여다본 내부도 이따금 눈을 깜빡여 접하는 외부도 선명하지 않았다.
-잡념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없고, 온종일 멈추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동요하는 잡념을 지켜보는는 일은 고단했다.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두통과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일곱째 날 저녁엔 기진맥진해 한순간 육체를 감각하는 일과 잡념을 멈추려 아등바등하는 일을 멈춰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환희를 내질렀다. 침묵과 고요의 기쁨이 찾아왔다. 한없는 자유를 느꼈다. 생각과 소리를 멈추고자 하는 과정적 집착에 골몰해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감각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것이 비파사나가 추구하는 진정한 의미의 해방은 아니겠지만 집착하는 일에서 벗어나 느낄 수 있는 자유의 일부를 맛 본 기분이었다. 짜릿했다.
DAY 8.
-센터 내에는 아주 작은 산책 공간이 있었다. 휴식 시간이 되면 20미터가 채 안 되는 그 길 어딘가 수북한 나뭇잎 사이에 앉아 변화하는 세계를 관람하곤 했다. 새들이 두발 모아 총총 뛰고 다람쥐가 포르르 달음박질치고 나뭇잎이 파삭파삭 떨어져 내리고 안개인지 먼지인지 연기인지 모를 뿌연 공기 사이로 눈부신 햇빛이 흘러내리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광경. 그렇게 분주히 흐르는 시간을 따라 모든 것이 활기를 뿜으며 변화하고 숨 쉬는 걸 보고 있으면 같은 순간은 정말이지 단 한순간도 없다는 걸, 시간은 쉴 새 없이 흘러가고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걸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DAY 9.
-혼자 있는 일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필요한 만큼'에서 '견딜 수 있는 만큼'까지의 고독이 갖고 싶었던 거였다. 간악하다. 나는 언제나 원하는 만큼의 '무언가'를 원한다. 관심, 고통, 외로움, 기쁨, 웃음, 활기. '적당히'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지점의 관념이다.
-하루 온종일 나로 가득한 나를 깨닫고 생각한다. 나는 나다. 어제도 오늘도 나였다. 나는 자라서 내가 될 것이고 죽는 날까지 나일 것이다. 어쩔 수 없고 바뀌지 않는 거겠지. 나로 가득 찬 과거와 또 다른 나로 가득할 미래를 별다른 거부감 없이 납득했다. 어제를 살아낸 오늘의 나는 곧 내일의 내가 된다. 하나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수많은 '나'의 흐름을 인정하자 '나'로 규정되는 일관적 정체성과 관계없이 자아적 집착에서 한 발 벗어날 수 있었다.
-수행 기간 동안 힘들었던 건 육체적 활력과 에너지를 발산할 수 없다는 것과 더불어 웃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코스를 시작한 지 아홉째 날에야 우리는 버둥대는 두꺼비를 보면서 웃었다. 내일이면 열흘간 지켜온 침묵이 끝날 거라는 안도와 함께 밀려든 웃음이었다. 어색하고 간절했다. 웃음이 격렬해지자 증거라도 없애듯 후다닥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지만 이미 맛 본 웃음은 횡격막에 찌릿한 감각으로 남았다. 웃고 싶다, 더 웃고 싶었다. 웃음에 대한 갈망이 온몸의 내벽을 긁었다. 누군가와 함께일 때 사람은 웃는다. 웃음은 사회적 반응이자 행동양식이고 관계의 수단인 동시에 산물이다. 이따금 혼자 지낼 때, 애써 웃지 않는 딱딱한 얼굴이 편안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내 진짜 얼굴인가 보다고. 함께일 때의 웃는 얼굴은 꾸며낸 가면 같은 거여서 힘이 들었나 보다고. 그러나 실상은 함께여서 웃을 수 있었던 거였다. 그게 못 견디게 그리웠다. 마주한 눈을 바라보고, 웃는 상상을 했다. 간지러웠다.
DAY 10.
-명상하는 동안은 하루 종일 앉아 호흡할 뿐인데도 피곤이 물밀듯 덮쳐와 아홉 시면 꿈도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누군가 요즘 뭘 하냐고 물으면 우스갯소리처럼 '숨 쉰다'라고 답하곤 했는데 이렇게까지 숨만 쉬는 생활을 하고 보니 사실 난 참 바지런히 뭘 하고 있었더라. 역시 바닥엔 끝이 없다.
-코스 기간 동안 우리는 세계로부터 격리되었지만 사람으로부터 고립되지는 않았다. 수련생들은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배려했다.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하고 , 이름 한 번 부르지 못한 채 서로에게 익숙해져 갔다. 그건 또 다른 종류의 은밀한 친밀감을 주었다.
-비파사나는 내게 어떤 엑스터시나 깨달음을 주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했다. 핸드폰을 자발적으로 제출하고 세계와 거의 완전히 단절된 채 열흘이나 말하지 않고 지낼 기회는 사실상 부재하니까. 조용하고 평화로웠으나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나로 가득 찬 열흘이었다.
-가르침에 사사건건 꼬리를 잡고 고민하다 보니 어쩐지 꼰대가 된 기분이지만, 난 어딜 가도 불만 반동분자다. 어쩌면 고분고분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들면서 무얼 깨달을 수는 없는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비파사나 수련은 각각에게 다른 경험으로 기억된다. 지인 A는 세계와의 깊은 연결을 느꼈고, 지인 B는 지난 삶을 속속들이 회상하며 그 운명적 우연에 감탄과 감사를 느꼈다고 했다. 나는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느낀 적 있는 것을 되느끼고, 의문하던 것을 다시 의문했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했는데 순순히 남의 말을 듣는 종류의 인간은 못되어서 잔뜩 고민만 안고 말았다. 최근 2년 사이의 이런저런 경험으로 어지간한 외부의 자극에 무심해지기는 했는데 마음의 평화는 여전히 멀고 어쩐지 그냥 만사 재미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다. 어쨌거나 열흘 간의 침묵은 아름다웠다. 어딘가 수행의 핀트가 엇나가 버린 것 같은데, 바로 잡으러 다시 갈 테다. 언젠가는 침묵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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