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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Nov 06. 2015

참을 수 없는 가벼움

#태국, 방콕(Thailand, Bangkok)


막내 딸이 꼭 나와 같은 나이라 아저씨는 대각선 맞은편 침대의 주인이셨다.



이미 여러 번 태국을 방문하셨다는 당신은 얼핏 듣기에도 심상치 않은 여행다. 준비도 뭣도 없이 덜컥 방콕에 떨어진 나는 숙소 도착과 동시에 당신이 지난 경험으로써 안내하는 태국 속에 무임 승차했다. 역사와 문화를 비롯하여 근처 지리와 맛집까지 두루 통달한 당신 곁에서 나는 빵 부스러기를 줍는 어린 남매처럼 쏟아지는 이야기를 주워 담았다.


어느 날에는 대학의 카페테리아 앞에 앉아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버지와 딸로 엮인 사이가 아니라 길에서 마주친 여행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신께서는 당신 딸들께 못다 한 이야기를 쏟아내셨고, 나 또한 아빠에겐 결코 못할 이야기들을 툭툭 꺼내어 걸어놓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로 키들키들 많이 웃기도 했다. 당신의 딸들을 참 사랑하는 분이셨다. 우리는 커다란 타이 밀크티의 얼음이 다 녹아내릴 때 까지도 벤치를 떠나지 않았다.





Thailand, Bangkok (2015)




문득 그가 말했다.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은 가벼이 해.    
  



함께 하는 식사자리나 어딘가로 향하는 길 꼼꼼스레 빈자리를 챙기는 나를 눈여겨 보았던 모양이었다. 그의 충고를 듣고 나서  3초쯤 뇌가 모든 활동을 멈춘 것 같았다. 짧은 침묵이 지난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웃어 보이는 거였다.

 

당신께서는 좋은 분이셨지만 가지라 말씀하신 가벼움은 싫었다.


그 가벼움 때문에 나는 지난 4일을 한 방에 머물렀던 당신의 이름조차 몰랐던 것인가?

나는 언제고 잊힐 일회적인 만남의 소모품이었기 때문에?


어떤 만남은 짧고 가벼워도 진하고 깊다. 누구는 이름을 불러 한 인간을 꽃으로 피워내고, 누구는 당신의 이름으로 밥을 지어 며칠을 먹었다는데 세 음절 이름조차 모르는 관계에 어떤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었을까. 곰곰이 그 말을 곱씹다가 기운이 빠졌다.




시간을 쓰고 마음을  쏟아 한 사람을 알아가는 일을 가벼이 하는 것이 가당한.


여행 중 만났던 이들은 나에게 귀한 인연이었다. 평생을 알아 온 사람들보다도 생각이 맞고, 말이 맞아 만남이 즐겁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사람들을 스치고 많은 것을 배우면서 나도 한 뼘쯤은 컸다. 그런 사람들을 가벼이 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나는 도저히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이 곳을 이미 좋아하고 있다. 하루가 끝날 무렵엔 ‘집’으로 간다. 맛있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빵집을 알게 되었다. 제법 익숙하게 버스를 탈 수 있게 되었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야금야금 이 곳을 알아가고 있다.    



그가 인연을 가벼이 하라 한 것에는 분명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믿었던 이의 차가운 등을 보았을 수도 있고, 좋아했던 이의 어떤 모습에 크게 실망을 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늘 있기 마련인 이별의 무게는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도 좀처럼 어지지 않으니 무거운 상처는 쌓이고 쌓일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은 너무 깊어진 상처가 덧나기도 할 거다.


그래도, 어느 날 곪아 터지더라도.


나는 다가온 인연을 다부지게 챙기고 이 순간을 악착같이 사랑하고 이 곳을 남김없이 들이마실 거다. 로 인하여 나을 수 없는 병이 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는 아마 쉬이 마음을 내주는 내가 안을 상처를 쓰러이 여겼을 거다. 당신께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으니 그런 말을 꺼내게 되었겠지. 그러나 나는 결코 주어진 것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을 생각이다. 오히려 전에 없던 욕심을 내고 있다. 놓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많이 만났다. 이미 내게 방콕은 아주 특별한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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