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敬愛)의 마음』김금희
뭘 쓰겠다고 생각하고 읽거나 보면 평소보다 두배, 세배는 더 마음을 들이게 된다. 신중하게 문장과 마음을 오래도록 굴리며 읽었다. 최근엔 어쩐지 할 일이 많아서 (급한 건 마음뿐이지만) 저녁에야 겨우 시간을 내 한 챕터를 읽곤 했는데 매일 그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다 읽고 나서는 이렇게 아껴 읽은 책이 <경애의 마음>이라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장인물의 첫인상은 하나같이 눅눅했다. 그들은 사람을 잃거나 사랑을 잃거나 직장을 잃었고 따돌림을 견디고 있거나 가족과 의절하고 소셜 네트워크에 만든 가상의 역할에 애착하거나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알콜 중독으로 손을 떨었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아파 보였다. 일상이 주는 안정과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 같았다. 한 구석이 부서지거나 망가져 마음을 절고 있는 사람들의 우울감에 전염되어 자주 기분이 흐렸다. 처음엔 그랬다.
경애는 한번 '마음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기를 선택' 해본 사람이다. 그 시간이 사람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알기에 그는 죄책감과 자기방어 속에 갈등하면서도 한사코 맞서기를 고집한다. 상수도 마찬가지다. 그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무언가를 '하지 않아야' 겨우 살 수 있는' 시간을 지나왔다. 둘은 삶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지만 세계와 거리를 둔 채 스스로 고립되기를 택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불편해한다.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바스러진 마음의 굴곡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퉁명스럽고 경직된 태도로 일관하는 그들은 꽁꽁 숨겨둔 공통의 경험으로 서로를 먼저 인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과 그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버티고 있는 건 상처받은 사람이 쌓는 자기 방어의 두터운 벽이다. 그들은 벽 뒤에 웅크리고 앉아 주어진 시련을 버티고 견디고 묵묵히 짊어진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나를 방기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물이 겪는 사건은 때로 너무 가혹해서 괜히 내가 억울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도대체 왜 이러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자 누구에게든 따져 묻고 싶던, 그러나 한숨을 쉬는 것 밖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순간이 연이어 떠올랐고 이 잔혹한 상황이 아주 있을 법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이 되고 만다."
상처, 혹은 상처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화인처럼 새겨져 그대로 나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변형된 마음도 폐기하거나 교체할 수는 없어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끌어안아야 한다. 슬픔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용해 다양한 형식으로 마음을 허물고, 사람들은 이것이 자기를 파괴하리라는 걸 예감하면서도 어떤 간절함 때문에 예기된 절망으로 가는 길에서 비켜서지 못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마음을 잃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날'들이 온다. 정확히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날들. 그런 날들에 발을 걸려 우리는 자주 넘어진다.
경애의 삶은 이제나 저제나 고난하다.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숨을 턱턱 졸라 오고 엄마는 유방암에 걸리고 오랜 연인은 떠나간다. E를 죽게 했던 호프집 사장이 전도사가 되었다는 기사를 읽고는 어디로도 분출할 수 없는 분노에 허망해하기도 한다. 살아 있기에 살아야 했던 날들, 도망치지 않았고 도망칠 수 없었던 순간들을 달음박질쳐 닿은 곳은 시골의 물품창고, 사실상 유배지였다.
그러나 무릎이 깨어져도 사람들은 다시 일어난다. 저마다 삶에 의미를 만들고 때로는 익숙한 것을 떠나기도 하면서. 삶의 막다른 끝에서 내리는 결정은 대부분 일단 (지금 당장을) 살아남기 위한 것인 경우가 많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열하거나 구차해 보일지라도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고 자신에게는 최선인' 선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다음 하루를 맞을 수 있다. 견뎌내거나 나아가거나. 어쨌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삶의 어떤 시기를 통과해낸다.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세상의 모든 구원은 셀프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고 구하는 자는 얻을 것이다. 죄 많은 나를 구원해 줄 구원자는 성경이나 영화 속에나 존재할 뿐이다. 구원을 찾으려면 다시 일어서야 한다. 경애는 '부당하게 대하는 것들에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을 구하기로 한다.
오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마침내 돌아오는 기적 같은 엔딩은 아주 거짓말 같아서 역시 소설, 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더 현실 같기도 했다. 그러나 둘이 함께일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시간 때문이 아니다. 서로를 인식하지 못했던 과거의 시간 속에서 상수와 경애는 존재했지만 유의미한 실재가 아니었다. '상수의 마음속에서 걷고 말하고 먹고 마시는 경애라는 형상'이 생기고 경애가 '마음에 사무친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차마 그러지는 못'하는 상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였던 공동의 시간 덕분이다. 인식하지 못한 채 이어져있던 과거의 접점이 아니라 '추억과 대화, 어긋났던 감정의 순간과 실패의 경험과 자주 있었던 낙담과 서로를 서툴게 위로했던 날들'이 개인을 어떤 '실감'으로 만들고 마침내 서로를 각자의 삶 속에 고유한 질량으로 실재하게 한 것이다.
책에는 함께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넘어진 적이 있어서 아픈 사람을 이해하는, 스스로 일어나도록 묵묵히 기다려주는 저 속 깊은 사람들과 함께라면 앞으로의 시간을 더 유연하게 통과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덤덤하고 퉁명스럽게 내뱉는 투박한 말이 되려 묵직한 위로가 됐다. '가해자가 누구든 수치의 올바른 당사자를 누구에게 미루'지 않는 상수의 '순정한' 분노가 고마웠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오는 일이 무동력 에베레스트 등반 못지않게 힘든 일일 수가 있'다고 말하는 경애가 얼마나 다정했는지 모른다. 작가는 사람을 사람에 잇는 방식으로 상처 난 삶을 위로한다. 오직 살아있다는 이유로,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시간의 무게를 곰곰 돌이켜 보았다. 결국 이 책은 잘 부스러지는 마음을 가진 내게 끌어안고 잠들고 싶은 위안이었다.
책의 말미에서 상수는 '오늘만 견디는' 사람으로 남기를 거부한다. 대신 '오늘이 있으면 당연히 내일이 있고 내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해결이 되든 되지 않든 마음을 쓰다가 하루를 닫는 사람이고 싶'은 상수가 있다. 여전히 무엇하나 명쾌하지 않은 일상이지만 폐기될 수 없는 마음과 폐기되지 않아야 하는 일들을 움켜쥐는 경애가 있다.
사는 일에는 낙오가 없다. 목적지가 불명확한 삶 속에 표류하더라도 굉장히 거창한 목표가 없어도 다른 사람 눈에는 늙고 남루해 보여도 삶은 자체로 충분히 정당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누군가를 그렇게 불행하게 여길 자격'이 없으니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다. '언니, 저는 파괴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고 고백하던 경애는 파괴되지 않았다. 조 선생은 '당장의 폭풍우가 아니라 삶을 더 집요하게 잠식할 안개를 경계하자고' 말한다. 그 말이 꼭 아무리 힘들어도 삶을 내버려두지는 말자고 어깨를 다독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다보면 '각자 표류하다가 우연히 서로를 발견' 하는 기적을 만날 수도 있을 테니까.
*볼드는 <경애(敬愛)의 마음>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