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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Nov 29. 2015

도망자의 세레나데

떠나왔지만 떠나지 않는 자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는 것에 붙는 보편적인 이유라면 역시 '익숙한 것에서의 탈피', 즉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일 거다.



일상은 단조롭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같은 장소로 출근하는 작은 틀부터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단위로 미묘하게 변주되는 커다란 반복까지. 대개 우리의 삶이란 A B A' A에서 겨우 A B A'' A 따위로 변주되는 단순한 루프의 멜로디 인 것이다. 미래가 쉽게 예상되는 나날은 금세 지루해진다. 어떠한 새로움도 상상 가능한 범위의 것이니 사람은 무뎌지고 시간은 더뎌진다. 이러한 시간의 진행에서 벗어나 단조의 곡을 장조로 바꾸고, 4/4 박자의 일상을 3/4 박자 왈츠로 바꾸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 아마도 여행. 고작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것만으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A와 B로 구성된 지루한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C의 리듬을 삽입할 수 있다.


오직 낯선 세계에 던져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는지. 요즘 여행은 그야말로 메가 트렌드다. 그러나 나에게 여행이란 늘 일탈보다는 '또 다른 익숙함으로의 도피'로써의 색채가 짙다.





Thailand, Bankok (2015) ,  Adhere The 13 blues bar





처음엔 나 또한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온갖 새로운 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낯선 언어, 푸르거나 까만 눈동자, 겪어 본 적 없는 추위나 더위, 신기한 교통수단과  난생처음 경험하는 맛. 모든 것이 기쁨이었고 그 속에 파묻히기 위해 부던히도 골목들을 헤매었었다. 그렇게 눈이 휘둥그레지는 새로움에 파묻혀 지내다 문득 깨달은 아이러니. 일련의 사건들로 반복 구성되는 시간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온 내가 여행지에서의 생활에 또 다른 규칙과 루틴을 만들어 내고 있더라. 이것을 낯선 곳에서의 '일상 찾기'정도로 해두자. 작은 습관들로 시작된 일상 찾기는 한 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점점 정도를 더해갔다.


방콕을 예로 들어보자. 매일 아침 찾는 베이커리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늘 주문하는 메뉴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길을 물어 올 때 답하는 것이 어렵지 않아졌고 매일 걷는 길에는 아는 얼굴이 생겼다. 특정한 곳으로 향하는 버스 번호를 두 개 이상 알게 되었으며 익숙지 않던 잠자리는 어느새 '집'이 되었다. 푸껫이나 파타야, 혹은 싸와디캅 하는 인사말로 대변되던 '타이'는 지워졌다. 대신 짓궂은 눈빛과 따가운 햇살, 옅은 하늘을 괴고 누운 붉은 달 같은 것이 빈자리를 채웠다. 방콕은 어느새 나를 이루는 조각이 되었다.


고작 한 달이다. 연고도 없던 곳에 진득한 습관과 관계가 생긴 것이.





늘 걷는 길과 늘 하는 일과 늘 먹는 메뉴가 생기는 것





나의 일상과 습관이 완연히 새로운 곳에서 익숙한 패턴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여전히 '내일은 뭐하지?'가 최대의 고민인 흥청스러운 시간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규칙이 끊임없이 직조되고 있다. 새로운 규칙들은 기존의 것들 만큼이나 견고하게 쌓였다. 발 닿는 범위의 장소와 손 닿는 범위의 시간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새로운 나를 촘촘히 짜내는 일은 흥미롭다. 그 과정을 거치고나면 어느 곳이든 자연스레 새로운 삶의 범위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전의 일상만큼이나 익숙해진 그 장소를 더 없이 사랑하게 된다.










방콕으로 향하던 날, 나는 근거 없는 패기로  넘쳐흘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나는 주제에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고 울 준비만 단단히 했다. 현실에서의 안정을 꾀해보려 했던 지난날이 도피였다 외치며 도피가 아닌 여행,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써의 여행을 하리라 다짐했었다. 주위의 시선이 퍽 따가웠지만 이상조차 없는 이들의 비난은 받지 않겠노라 말하며 떳떳하려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니 현실 도피는 아니었어도 감정의 도피는 맞았다.


나로 가득 차 부끄러운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태한 인간은 여전히 이 곳에서의 생활에 흠뻑 취해있다. 새롭고도 익숙한 풍경 속에서 흐르는 시간에 멜로디와 가사를 붙인다. 겨우 낸 용기에 적은 돈을 보태어 사들인 낯선 시간 속에서 가장 익숙한 나를 만나고 있다. 그 속에서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법을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배운다.

















질투나 슬픔을 사랑의 결함이라 한다면 외로움과 두려움은 여행의 이면이 주는 결함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예외 없이 찾아오는 고독과 무수한 불확실성에 여전히 하루 걸러 하루는 무릎을 꿇는다. 나약한 나에게 의문과 질타를 던져놓고선 답 언저리에도 닿지 못한 채 쓰러진 것도 여러 날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되묻는다. 나는 왜 이곳에 있을까? 이 모든 방황의 끝에 내가 찾게 될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무엇을 찾고 싶은 걸까? 결국엔 무언가 알게 되기는 할까? 무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닐까?


쏟아지는 질문에 찾은 답은 여태 아무것도 없다. 그런 스스로가 자주 한심한 것도 사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여행자다. 보통의 공기 대신 밀도 높은 이상으로 폐를 채워 나중엔 가라앉게 되더라도 내게 주어진 유일한 사치가 이 시간이라면 적어도 지금은 즐겨야 하지 않나.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 현실을 털어내려 애쓰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에 감사하라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다. 볼륨을 높이고 눈을 감아 악에 받힌 노래를 부른다. 괜찮아. 할 수 있어. 나는 행복해. 매일 사랑해. 주문처럼 되새긴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이 글은 여행에 바치는 세레나데다. 게다가 모든 존재의 어두운 이면을 끌어안을 수 있을 때 까지 기약 없는 도돌이표를 그릴 참이다.















여러 날 같은 달을 올려보았어도

너와 나 사이엔 여전히 한 뼘이 있어

온통 낯선 세계보다도 낯선 너를 만나는 일이  더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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