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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by 잉지


일련의 규칙처럼 흘러가는 단조로운 일상에 익숙해졌다.

J와 함께 하는 일은 아무래도 지겹지 않다.


이렇게라면- 이렇게 살 수 있다면.



늦은 아침도 뜨거운 바람도 누군가와 함께인 것도 좋다. 그리고 종종, 혼자인 것도 좋다.


종종- 혼자인 것도 좋다, 까지 생각하고서

종종- 혼자인 것도 좋다, 라니- 한숨을 쉬었다.


나는 왜 이렇게 이기적인가.

‘종종’ 혼자인 것이 좋다니.

'종종' 혼자이고 싶어 하다니.






실없는 이야기가 드문드문 오가고 너나 할 것 없이 선풍기 바람 아래 드러눕게 되는

하얗고 밝고 따뜻한- 게스트하우스가 온전히 집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편안하다.

고요가 지루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기타 선율과 함께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떠돌았다.


생각도 없던 방콕이 생각지도 않게 좋아졌다.


나도 날이 뜨겁다는 핑계로 많은 시간을 숙소에서 보내는 틈에 기타를 배웠다.

(게스트하우스_보드게임방_기타 교습소)

G A C Em까 4개의 코드 진행이 전부인 단순한 곡인데, 화음을 짚는 것도 멀티(multi-)라고 손가락이 자꾸 버벅댄다. 떠나기 전에 한 곡쯤은 제대로 치고 싶은데.












저녁엔 어쩌다 7년째 한국을 오가고 있다는 여행 예찬론자를 한 명 만났다. '엄마의 기대와 바람이 무거워요.' 털어놓았더니 언젠가는 가족도 포기하게 된다며 나의 대책 없는 방황을 격려해왔다.


그는 열렬한 지지를 보내왔는데,

오히려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나이를 더 먹은 후에도 이렇게 단조롭고, 가난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생활에 만족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사는 일이 괜찮은 일이 될까?



재작년 학교를 졸업한 뒤엔 곧장 여행을 떠나려고 했었다. 아주 오래. 런데 어느 순간,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도망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다. 그래서 돌연 여행을 취소하고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취업을 하고 보니 여행을 갈 용기가 없어서 일로 (평범한, 일상적인 삶으로) 도피한 것 같았다. 도피, 도피, 도피. 그래서 이젠 도망치지 않겠다며 자못 당당하게 길을 나섰는데,


사실 나는 도피로 도피하고 다시 도피하며 도망만 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거다.

이 모든 과정이 또 다른 도피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결국 여행자-라기보다도 도망자- 인건 아닌가.




순간의 '행복'은 나의 가장 큰 지향점이 아니다. 행복하기 위해 모든 걸 다 내던질 필요는 없다.

그것보다도 후회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떳떳한 삶.

그것을 위한 지속적이고 만족스러운 가치가 더 절실했다.


치열하지 않기 위해선 누구보다도 치열해야 한다.

다분히 모순적이고,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

게으르고 나태한 인간의 숨통을 조였다.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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