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3)
요즘은 무슨 바람인지 지난 영화가 줄줄이 재개봉을 한다. 이유야 뭐가 되었든 고마운 일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처음 본 건 중학교 때다. 그 후로도 종종 보기는 했는데 평균 이하의 기억력을 가진 인간인지라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는 까마득하고 그저 '좋아하는 영화'를 말하라면 빼놓지 않았던 것만 기억난다. 재개봉 소식이 들리자마자 상영 스케줄을 확인하기 시작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 날에야 보고 왔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일에 관심이 많을까?
영화는 츠네오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마작 가게에서 시작한다. 모여 앉은 사람들은 이른 새벽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노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유모차 안에는 뭐가 있을까?'가 대화의 주제다. 손자니 숨겨둔 보물이니 얼토당토않은 추측이 난무하고 확인할 길 없는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급기야 누군가 직접 확인을 하러 나서기에 이른다. 예상치 못한 급습에 놀란 노파는 유모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고 유모차는 그대로 내리막을 굴러 난간에 부딪힌다. 그리고 퇴근 중이던 츠네오의 뒤에 멈추어 선다. 놀라서 돌아선 그는 유모차에 다가가기를 주저한다. 소문의 정체를 확인하기에 앞서 두려움이 일었기 때문일 거다. 괜찮은지 확인해 달라는 할머니의 외침을 듣고서야 머뭇거리며 다가가 담요를 걷는다.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던 조제(쿠미코)가 모습을 드러낸다. 숨소리가 거친 것으로 보아 놀란 것이 분명한데도 그녀는 외마디 소리조차 지르지 않았다. 입을 앙 다물고 어깨를 들썩일 뿐.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비명과 놀람, 고통마저도 집어삼키며 절박하게 자신을 숨기고 있다. 뭉툭한 부엌칼을 겨누는 조제의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것은 츠네오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를 둘러싼 모든 세상을 향한 것으로 보였다.
할머니는 고마움의 표시로 츠네오를 아침 식사에 초대한다. 거듭되는 권유에 마지못해 집에 들어서면서도 츠네오는 기묘한 두 여인을 향한 미심쩍은 눈빛을 거두지 못한다. 그런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은 국 한 숟갈을 입에 떠 넣었을 때였다. 언제 경계했냐는 듯 밥 두 공기를 뚝딱 해치운 얼굴엔 만족감이 서렸다. 맛있는 밥이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그 후로 츠네오는 밥을 핑계로 조제와 할머니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위험하니 산책은 그만두는 게 어떠냐는 츠네오의 제안에 조제는 세상의 종말이라도 들은 듯 하얗게 질린다.
꽃도 봐야 하고- 고양이도 봐야 하고
말까지 더듬으며 답하는 그녀를 보며 츠네오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마음이 아팠다. 유모차 안을 궁금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매번 수모를 겪으면서도 조제가 산책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꽃과 고양이로 대변되는 바깥세상이었다. 너무도 작고 사소해서 더 애틋한 그녀의 이유. 할머니가 주워오는 버려진 책이 곧 그녀의 세상이고, 모두가 잠든 시간 담요 밖으로 눈을 빼꼼 내고 볼 수 있는 꽃과 고양이가 그녀의 최선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것이어야 할 세상을 그녀는 나쁜 짓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숨어서 훔쳐봐야 했다.
어느 날, 츠네오는 할머니가 잠든 틈을 타 조제를 데리고 산책을 간다. 영화에서 할머니는 그녀를 보호하는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모순적인 존재다.
마을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주제를 알아야지 너는 몸이 불편하잖아.
등의 언사로 보아 그녀가 다리가 불편한 조제를 부끄러워하며 부정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할머니와 함께 하는 산책이 담요 속에 온 몸을 묻고 작은 틈으로 밖을 바라보는 염탐이었다면, 츠네오와 하는 산책은 거리낄 것 없는 세상과의 첫 만남이었을 거다. 밝은 태양, 얼굴을 스치는 바람. 늘 노심초사해야 했던 조제에게 그가 보여준 세상은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그것은 그저 '오후의 산책'이 아니었다. 함께함으로써 그는 조제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했다. 반강제로 자신의 작은 세계에 숨어야 했던 조제는 츠네오 곁에서 조금씩 밖을 향한다. 그리고 소리친다.
앞으로!
일련의 사건 이후 멀어졌던 둘의 관계는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츠네오가 조제를 찾아오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조제는 울부짖듯 마음을 전했고 마찬가지로 그녀를 잊지 못하던 츠네오는 돌아와 그녀의 연인이 된다. 그렇게 조제를 세상으로부터 떨어뜨려놓던 할머니의 빈자리를 츠네오가 채웠다. 그와 함께 그녀는 천천히 멀기만 했던 세상 속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 달 후, 일 년 후>를 통해 넌지시 말하던 사랑이 변하는 기간. 1년 후, 츠네오는 조제를 제사에 데려가기로 한다. 출발할 때만 해도 처음 떠나는 여행에 들뜬 조제와 츠네오는 즐거워만 보였다. 그러나 문 닫힌 수족관 앞에서 조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 '그 순간'이 찾아오고 만다. 모든 것이 바뀌는 순간. 행복하고 아름다워 영원하리라 믿었던(믿고 싶었던) 모든 것이 변하는 순간. 등에 업힌 채 떼를 쓰는 조제와 굳어가는 츠네오의 얼굴이 동시에 스크린을 채웠다. 가슴이 서늘해져 왔다. 공간을 채운 싸늘한 침묵을 느끼면서 두 연인의 마지막을 예감했다. 이후 츠네오에겐 터널의 불빛을 아이처럼 좋아하는 조제도 짜증스러울 뿐이다. 휴게소에 멈춰선 츠네오는 끝내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가지 못하겠다는 말을 전한다. 그 후 미안함에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웃고만 있는 그의 얼굴이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조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내비게이션을 끄고 바다로 가자고 한다. 그녀 역시 이 사랑의 끝을 예감했겠지.
여행에서 돌아온 후, 결국 둘은 헤어진다. 표면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담담한 이별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조제를 떠나 길을 걷던 츠네오는 별안간 눈물을 쏟아낸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지난 사랑에 대한 아픔은 처절했다.
마지막 여행에서 조제는 말했다.
언젠가 네가 사라지면 나는 다시 해저를 데굴데굴 구르게 되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아.
작고 여린 조제는 강하고 의연했다. 이별 후 그녀는 츠네오가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유모차 대신 전동휠체어를 탔을 뿐 장을 보고 밥을 하고 여전히 의자에서 힘차게 뛰어내린다. 하나의 사랑이 떠나갔지만,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지난날 좋아했던 영화와 책은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매년 사들이게 되는 비슷한 스타일의 옷과 꼬박꼬박 구입하는 작가의 신작, 높은 확률로 좋아하게 되는 비슷한 장르의 영화들을 보면 취향이라는 건 정말 무섭도록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결점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다.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지만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의 끝에는 세상을 향해 칼을 겨누던 조제가 없다. 대신 새로운 일상을 지켜나가는 조제가 있다. 늘 외로웠기에 외로울 것도 없다던 시커먼 고독에서 헤엄쳐나온 그녀는 더 이상 숨지 않는다. 츠네오와의 일 년이 그녀를 바꾸어놓은 덕이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랑을 호르몬의 작용으로 설명하는 일이 낯설지 않아졌다. 덕분에 '사랑'이라면 코웃음을 치며 호르몬을 운운하는 냉소적인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 탐탁지 않지만 사실은 사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호르몬의 화학 작용으로 치부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가지는 힘과 긍정적인 변화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렇다. 사랑은 새로운 세상으로 다가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사랑을 한 후에는 사랑을 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랑으로 사람이 변하고 이별로 또 많은 것들이 변하지만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랑이 곧 삶이 되고 삶이 곧 사랑이 된다. 영화는 시종일관 담담했지만 사랑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면서 나는 많이 울고 웃었다. 둘이 모여 하나가 되는 세상은 언제고 아름답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기에 처연하고 아름다운 삶과 사랑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