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잉지 Apr 10. 2016

0413

다수결의 오류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시작한 잡기


2012년 04월.

내 생에 처음으로 투표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묘한 설렘과 책임감으로 집을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어어, 나 투표하러 집에 내려가.

했더니 신분증은 챙겼어? 물어왔다.



아아-

나는 꼭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덤벙대곤 한다.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은 물론 여권도 자취방에 있었다. 으억, 짧은 신음과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허무하게 첫 번째 투표권 행사의 기회를 놓쳤다.










오는 4월 13일은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정성 논란으로 화제가 된 선거관리위원회의 투표홍보영상 덕에 날짜만은 머릿속 깊숙이 각인되었다.


만약에 이걸 관공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들었다고 하면 이와 같은 논란은 적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_CBS 라디오뉴스


라고 답하는 선관위 대변인의 말에 기가 찼지만, 고도로 계산된 노이즈 마케팅이라면 성공적인 것 같다.



덧붙여 어이없는 영상만큼 불쾌한 것은 설현을 전면에 내세우고 거리에 펄럭이고 있는 입간판의 문구다.


투표하면 설현이 심쿵심쿵.

혹은

날 잊진 않으셨죠?


충격적이라고 밖엔 할 말이 없다. 쏟아지는 기사에 따르면 설현이 남심을 저격했고 그것이 투표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점이 엇나가도 너무 멀리 갔다. 설현을 '심쿵'하게 하기 위해 하는 투표가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민주주의라는 사회 시스템의 핵심 절차인 투표에 참여함으로써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설현이 아니다. 투표의 중요성과 국민의 권리를 일깨우기보다 연예인을 앞세워 투표율 향상이라는 결과에만 주목하는 행태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이렇게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해결책이라니. 투표율, 중요하지만 무언가 한참 잘못되었다. 도대체 국민을 얼마나 아둔하게 보면 이런 방식을 차용해 투표를 독려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선거일이 가까워짐에 따라 투표가 전반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으므로 자연히 현체제에 대한 생각도 많아졌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국가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민주주의는 함이 많은 제도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으로서 국가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도록 하기 위해 시행되는 투표의 기반인 다수결의 원칙에서부터 뚜렷한 오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참여하는 주체의 수가 늘어날수록 개인의 기여도는 낮아지고

선택과 결과가 일치할 확률이 불분명해질 뿐 아니라,


다수의 선택이 늘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강희(백윤식)는 말한다.


분했다. 분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더 이상 무심하거나 멍청하거나 무책임해서 힘없는 국민은 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대한민국의 오천만 인구와 나와 다른 뜻을 가진 수많은 타인을 생각하면 의기소침해진다. 우주에 먼지까지는 아니어도 운동장에 모래 한 알쯤 될 나의 표가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지도 가늠할 수 없다. 나의 선택이 가지는 영향력이 다가올 미래에 반영되리라는 희망도 미미하다. 확신하거나 당장 확인할 수 없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겪어보기도 전에 패배감에 젖는 대신 작은 영향이어도 보태는 편이 낫다. 미숙할지언정 무책임하거나 무심하지는 않으려 한다. 언젠가 더 나은 제도와 사상이 나타나면 민주주의 역시 귀족제나 군주제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지금 나로선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엇이 최선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민주주의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해 보기로 했다. 벌써부터 신분증을 챙겼다. 개, 돼지가 아니라 존중받는 개인이자 국가의 주인으로 떳떳한 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무제(無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