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크로와상.
조금 망설이다 늘 마시던 카모마일 대신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나는 왠지 이런 종류의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을엔 붕어빵, 찜질방엔 계란, 크로와상엔 카푸치노.
우리는 타인 없이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진솔한 '나'보다도 남에게 비추어졌으면 하는 '나'의 모습을 더 많이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느라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보이고 싶은 모습이나 되고 싶은 모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나'와 남이 원하는 '나' 사이에서 무수히 많은 '나'가 생겨나고 쌓인다. 무의식의 바닥에 있을 진짜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걱정하다가 문득 의문했다. 그렇다면 타인 없이 나를 정의하는 일은 가능한가?
대개 인간의 3대 욕구로 성욕, 식욕, 수면욕을 꼽는다. 개인적으로는 표현의 욕구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손짓, 발짓을 거쳐 말이 되고 그림이 되고 글이 되었을 자기 표현의 방법은 사진, 영화, 음악까지 영역을 넓히며 다양성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성욕은 번식, 수면이나 식욕은 생명 연장을 위한 수단이라고 볼 때
표현의 욕구는 무엇을 위한 수단일까?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타인으로부터 이해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개개인의 발현은 소통을 가능케하고, 사회는 상호의 소통에 기반하여 운영된다. 저마다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에게 이해받고자 하는 열망은 본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구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꾸며내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타인으로 하여금 '나'를 정의하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어쩌면 타인을 통해야만 개인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해받고 싶은 인간의 밑바닥에는 외로움과 고독이 있다. 고독은 세월의 주름을 따라 고이고, 때문에 청년의 고독과 노인의 고독은 전혀 다른 깊이로 다가온다.
언젠가 '고독사 하는 노인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자취방 어두운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고독하게 살다가 고독한 채로 죽다니 너무 슬프잖아, 그러다
만약 이대로 죽는다면 나는 언제쯤 발견될까?, 상상도 했었다.
일단은 주말 지나고 월요일, 몇 일간은 여행이라도 갔을까 궁금해하겠지. 일주일 넘도록 학교에 가지 않으면 그땐 누군가 연락을 해오지 않을까? 그마저도 닿지 않아서 문을 두드리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2주? 그럼 옆 방 사람이 더 먼저 알아채게 되는 건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하고서 문득 누군가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썩어 문드러진 채 발견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생각나는 친구 하나가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달까.
고독사라니, 진저리 치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어둡고 무거운 방은 아랑곳 않고 숨을 조여왔다.
그런 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