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는 언젠가 읽으리라 다짐하며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책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연이 닿지 않아 다음만을 기약해왔는데 고마운 사람이 스치듯 뱉은 말에 수고롭고도 지난한 과정을 거쳐 책을 보내주었다. 다시 한 번,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주관적인 감상부터 말하자면,
『롤리타』는 아름다웠으나 즐거운 책은 아니었다. 차라리 괴로웠다고 해두자.
아마도 기대했던 바와 전혀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걸작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악명(?) 높은 『롤리타』를 읽고 싶어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유명한 아동성애자의 이야기가 '사랑'일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모두가 비난해도,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관계라도, 용서할 수 없는 도덕적 문제가 얽혀있어도, 그것이 사랑이라면 존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형태가 아무리 극단적일지라도 나만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 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16p
첫 문장을 읽고 전율했다. 이 범죄가 사랑일 것이라는 기대가 첫 문장으로부터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깨달은 바에 의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잠시 사랑인가, 했으나 분명한 욕망이었다.
사랑의 탈을 씌운,
합리화와 역겨운 자기변호로 점철된,
욕망.
험버트 험버트(H.H)는 무얼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는 어린아이를 꼬여내고 어르고 협박하여 오랜 기간 강간·핍박한 파렴치한 범죄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의 환상(첫사랑 애나벨)을 롤리타에 투영시켜 스스로의 이상을 좇았을 뿐 그 누구도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책을 펼치고 머지않아 그것을 깨달은 후엔 스스로를 3인칭으로 가리키거나 준수하다는 외모를 끊임없이 자각시키는 등의 작은 행동에도 짜증이 일었다. 박식한 그가 인용하는 포와 플로베르, 그 외 수많은 문학 작품이 흥미롭고 재기 넘치는 문학적 수사가 즐거웠지만 결코 스스로가 바라는 대로 험버트라는 인간을 연민할 수는 없었다.
아래는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이다.
01.
사랑과 욕망의 경계는 무엇일까?
『롤리타』를 읽으며 박범신 작가의 『은교』를 자주 떠올렸다. 몇몇 흡사한 소설 속의 장치(사랑하는 객체에 투영되는 전신의 존재_『롤리타』의 애나벨과 『은교』의 D, 보편적으로 수용되기 힘든 나이 차, 경쟁자의 존재) 탓인 것 같다. 그러나 둘의 확연한 차이라면
은교를 향한 적요의 마음이 이루어질 수 없어 서러운 사랑이었다면,
롤리타를 향한 험버트의 마음은 사랑을 가장한 더러운 욕망이라는 것.
표면상 비슷한 형태의 관계가 양극단의 감정으로 다가오는 이유에 대해 고심하다 결국 『은교』를 다시 찾아 읽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아, 사랑이구나
소녀를 묘사하는 시인의 글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너를 사랑하는 이유를 고민했고, 무엇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했으며, 자신의 욕망보다 소녀의 안녕을 걱정했다. 그녀의 위해 자신을 눌러 담았고, 그녀를 통해 일흔 평생을 몰랐던 새로운 세상과 조우했다. 명명백백한 사랑이었다.
그에 비해 험버트는 늘 롤리타보다 자신의 비참을 먼저 생각했으며, 자신의 범죄를 변명하고 미화하려 부단히 애를 썼다.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피해자로 둔갑시키려는 가상한 노력은 대개 역겨웠다.
롤리타를 사랑했다 말하는 그의 변명은 하나같이 야비하고 터무니없었으며
내가 그녀의 순결을 빼앗기라도 했나? 감수성 예민한 여성 배심원 여러분, 저는 그녀의 첫 남자도 아니었습니다.
218p
사랑이라 부르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고
나의 노예가 원래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애라는 사실,
299p
최소한의 배려조차 갖추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국식 표현대로 몸이 '불덩이처럼' 펄펄 끓었는데, 기진맥진한 롤리타는 내 품에 안겨서도 끙끙거리고 콜록거리고 부들부들 떨었지만 나는 환상적인 체온으로 뜻밖의 쾌감을 선사하는 그녀를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었다.
316p
게다가 그는 자신이 집착해오던 이미지가 사라졌음을 깨닫자마자 롤리타에게 혐오와 분노를 느낀다.
2년 전 처음 만난 후로 그녀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한눈에 확인하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지독한 환멸을 느꼈다. 아니, 최근 2주 사이에 일어난 변화일까? 그녀에 대한 애정은? 전설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내 불타는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욕망의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무서울 정도로 정신이 맑아졌다.
325p
어떻게 이런 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구역질이 나도록 지독한 환멸'을 느낀 것은 오히려 나였다. 그는 어린 롤리타의 육체를 욕망했고, 멋대로 투영한 자신의 환상을 사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절망케 하고, 무력감과 상심과 좌절에 빠지게 하고서 아랑곳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내 비록 다리가 다섯 달린 괴물이었지만 너를 사랑했다. 내 비록 비열하고 잔인했지만, 간악했지만, 무슨 말을 들어도 싸지만, 그래도 너를 사랑했다, 너를 사랑했다! 그리고 때로는 네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고, 그때마다 지옥의 괴로움을 맛보았다. 나의 아이야. 롤리타, 씩씩한 돌리 스킬러.
458p
너의 욕망을 사랑이라 우기지 말라고 윽박이라도 지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사랑과 욕망의 차이는 '저승과 이승만큼' 멀다.
사랑은 이 세상 어떤 존재보다도 사랑하는 그(그녀)를 우선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어줄 수 있고 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불사할 것이 없다는 마음. 단 하나의 본능인 자기애를 넘어서는 감정, 나에겐 그것이 사랑이었다. 사랑도 욕망도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할지 모르나 욕망이 자신을 우선하는 마음이라면, 사랑은 타인을 앞세우는 마음이라는 점에서 정 반대의 길을 간다. 그 차이는 저승과 이승만큼이나 확연하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인가, 헷갈릴 수는 있어도
사랑인 것을 사랑이 아닌가, 생각할 수는 없다.
02.
『롤리타』는 출간과 동시에 수많은 논란에 휘말렸다. 21C의 인간에게도 충격적인 이야기 일진대, 1950년대는 오죽했을까. 나 또한 험버트가 써낸 욕망의 수기에 깃든 반발로 매 순간 목구멍으로 울컥울컥 치미는 역겨움이 집어삼켜야 했다. 그럼에도 그의 문장이 더없이 아름다웠다는 점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림 그리듯 묘사하는 시각적 글쓰기 방식이 경이로웠고 시적인 표현과 언어유희가 즐거웠다. 오묘한 경계를 담대하게 넘나드는 소설을 읽고 있자니 자연스레 오랫동안 답을 찾지 못한 고민이 고개를 들었다.
예술과 외설(Pornography)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애매한 기로에서 '심미성'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경외'와 '감동'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흡족하지 않았다. 논란의 여지없는 시원하고 명쾌한 경계가 존재할 것 같았다. 떫은 마음으로 며칠을 골몰했으나 만족할만한 답은 찾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조언을 구했더니 누군가는 '얼마나 뻔뻔스럽게 우기는가'에 달려있는 문제라 했고, 누군가는 '주목적의 차이'라 했으며, 누군가는 '관객의 판단에 좌우된다'고 했다. 모두가 맞는 말이나 하나같이 주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므로 일반적 잣대로는 부적합해 보인다. 답은 찾지 못했지만 무려 3주를 끌어온 글은 끝을 내야겠다. 답 없는 의문은 언제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므로.
어쨌든 『롤리타』는 불편한 마음에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책이었다. 덧붙여진 작가의 말을 읽고 그의 처지를 알게 된 후에는 작품이 조금 달리 보이기도 했다. 나보코프는 소련의 망명작가였다. 운 좋게도 불어니, 영어에 능했다고는 하나 그 어떤 언어가 모국어를 대체할 수 있을까. 작가가 언어를 잃다니. 글을 빼앗기고 어찌 살아간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가질 수 없는 것(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탐하는 이 소설을 썼을까? 현실에서 가질 수 없던 것을 험버트는 마음껏 유린하게 했을까? 그리고 알 수 없는 모순으로 그에게서 잔인하게 롤리타를 빼앗았을까? 그의 절망감을 이해하는 한편 새로운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PARIS REVIEW와의 인터뷰에서 나보코프는 작품의 도덕성에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문학이란 오직 심미적 희열을 줄 때에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단언한다. 작가 본인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도 더 이상 이 소설의 윤리의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사랑보다는 일방적 욕망에 가깝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은교』보다는 『더 리더: 책 읽어 주는 남자』와 가까워 보인다.
나보코프는 소설을 읽는 단 한 가지 방법을 재독(再讀)이라 했다. 곧 『롤리타』 를 다시 읽을 참이다. 그리고 기회와 능력이 된다면 지극한 탐미주의적 입장에서 원문도 함께 읽어보고 싶다.
*Image_ Ariann Alago, <Hayf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