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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트 Apr 04. 2018

할일을 미루는 나, 정말 게으른가?



해야 할일은 산더미인데, 매일 할일을 오늘 하지 않고 내일로 미루는 나다. 삐까번쩍 으리으리한 가죽 다이어리를 가방 속 고이 모시며, 하루하루 채워놓은 스케쥴에 동그라미, 엑스를 쳐가며 스스로를 담금질한다. 동그라미(O)에는 희열을, 엑스(X)에는 자책을 선사하며 더 나은 내일의 나를 기대한다. 나는 그것을 '성실함'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고, 성실함은 어느새 나의 성공적인 삶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나는 한번도 '성실한 나'를 경험하거나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늘 나 자신이 불만족스럽고, 할일을 뒤로 미루거나 게을리하며 비비적거리는 거울속 자화상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 내 모습을 피하고 싶었고, 그와 반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외부인들의 모습을 보면 마냥 부러웠다. 성공하기 위해 성실하게 살아온 연예인들의 다큐, 열심히를 넘어 미치게 살아야 한다며 '크레이지 라이프!'를 외치는 자기계발 강사의 강연 등 그것들이 내가 가야 할 삶의 지향점이 되었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만고 불변의 진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성실하지 않은 나를 자책하는 사이, '나는 왜 성실하지 못할까?'라는 질문은 해 볼 겨를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 누군가 나에게 성실함을 강요하는 나이가 지나 보니, 이제서야 늦게사 그 질문을 해 볼 일말의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껏 알았던 성실함이란, '내가 하기 싫은 것을 꾸역꾸역 해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기 싫은 학교를 꾸역꾸역 가서 8교시까지 수업을 채워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고, 배우고 싶지도 않은 과목의 학원을 다니며 밤 9-10시에서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학원 하나를 그만두려 하면,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던 부모라는 벽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했다. 왜 대학을 가야 하는지도 모른채 대학입시 시험을 봤고, 왜 졸업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채 대학에서 4년의 시간을 보냈다. 왜 해야 되는지도 모르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이 아닌 모든 것들을 꾸역꾸역 해내면서, 나는 그것이 곧 '성실함'이라 오역해 왔던 셈이다.


과거에는 개인이 특정 집단이나 권위에 고개를 숙이는 경우가 빈번했다. 노비는 양반에, 자식은 부모에, 학생은 학교에, 직장인은 회사에. 그래서 '억지로' 뭔가를 참고 인내하고 견뎌야만 하는 것들이 빈번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노비는 양반에게 해방됐고,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으로 다져진 아이들은 부모보다 훨씬 똑똑하며, 선생 또는 교수보다 훨씬 현명하다. 컴퓨터 한대로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는 이 시대에, 직장인은 특정 회사에 목숨을 바치거나 충성을 맹세할 필요도 없어졌다. 참고 견뎌야 할 '억지 성실'의 시대가 종말을 맞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할일을 미루는 건,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 일이 내 일이 아니어서다. 내가 하고 싶고, 내가 하기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미루는 것이다. 내가 자발적으로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해낸다. 단 하루 만에 밤샘을 해서라도 해낼 것이다. 귀에 따갑도록 듣던 '성실해야 한다'는 외부의 얘기는, '이제 좀 적당히 해라' 또는 '쉬어가면서 해라'로 바뀔 것이다. 


나는 게으르지 않다. 어떤 인간도 게으르지 않다. 모든 인간은 성실하게 태어났고, 의무가 아닌 필연 속에서 성실이 빛을 발한다. 문제는 내 인생에 어떤 불가항력적 힘이 외부에서 가해지면서, 나를 그리고 우리를 성실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기다려라', '참아라', '견뎌라', '인내하라'라고 속삭이고 외쳤던 수많은 외부의 무리들이 지금의 우리를 성실하지 못한 머저리로 만들었다. 시키는 것만 하고, 해야 할 것만 하는 노예가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 사회가 정의하는 '성실함'이고, 우리의 현재다.


수많은 좀비들을 본다. 아침 지하철에서, 점심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저녁 퇴근길에서, 야간 술집에서. 하고 싶은 것이 무수히 많지만, 해야 할 것이라는 족쇄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좀비들을 조우한다. 웃음을 잃었고, 핏기가 사라졌으며, 힘찬 발걸음을 잊었다. 언제까지,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는 팔다리 잘린 좀비같은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가. 언제까지, 도대체 언제까지 '성실해야 한다'는 뭣도 아닌 것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갈 것인가. 


그러기엔 시간이 많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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