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준비를 많이 해 갔다. 상대들은 이 업만 수십 년을 해 온 베테랑들이고, 나라고 해봤자 회사 생활 10년도 채 하지 않은 갓난아기에 불과하기에 연륜과 경험으로 무장한 회사 선배들을 논리와 말로 이기기란 여간 쉬운 게 아니다.
그래도 해 내야만 한다. 이겨 내야만 한다. 내가 얻고자 하는 바를 얻어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회의가 있기 며칠 전부터 크게 2가지 대응 방안을 강구했다. 하나는 '숫자', 그리고 하나는 '사례.
숫자는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는 가장 객관적 지표다. 한 사업을 하는 데 있어 총 사업비가 1천억 이냐 또는 2천억 이냐에 따라 해당 사업에 대한 진정성, 그레이드, 투자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나는 상대가 준비해 온 수치들이 얼마나 적정한 지를 파악하기 위해, 다른 유사 사례들의 수치를 일괄 정리했다. 개별 숫자에서 얻을 수 있는 적정성, 그리고 숫자들의 평균에서 도출되는 '평균의 합리성'을 과감히 들이밀었다.
숫자를 들이밀자, 그렇게 왈가왈부 하던 사람들의 불만 가득한 입이 쏙 들어간다. 그리고 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입을 삐죽 거리며 한마디 한다. "그 숫자가 여기에도 똑같이 통용되라는 법칙은 없어요."
그러나 내가 숫자를 보여주는 건, 내가 이 프로젝트에 너네보다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 왔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나의 과시, 무기인 것이다. '내가 이만큼 데이터를 갖고 있으니, 함부로 내 주장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지 말아라. 정말 논하려거든 너희도 숫자, 데이터를 갖고 와라' 식의 일방적이고도 강압적인 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던 것이다.
많은 경영학 서적, 그리고 수많은 경영인들의 자서전에서 언급되는 말처럼 "과거의 데이터가 현재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시대", 즉 데이터가 무의미한 시대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하여 확실한 데이터로 남아있는 과거를 내팽겨 칠 순 없다. 아무리 불확실한 주식 주가라도, 결국 사람들은 주식을 살 때 과거의 주가 대비 얼마나 고평가, 저평가 돼 있는지를 보고 현재 주가의 적정성을 파악하듯 말이다.
<A+B+@>에 해당하는 C라면 적어도 A, B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을까요?" 가 내 질문이었다. 남들 다 하는데, 왜 그것보다 나은 것을 지향하는 우리가 평균에도 못 미치는 의사결정을 하는가에 대한 질책이자 언지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그렇게 하면 돈이 더 많이 들 텐데..." 라고 푸념하던 상대 실무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최근에 여러분 회사에서 진행했던 000 프로젝트는 저희보다 투자비가 70% 수준인데도 방금 저희가 요청드린 것들이 다 반영돼 있지 않던가요?" 그렇다. 사례를 미리 준비해 갔다. 그들이 쉬이 부정할 수 없는,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확실한 논리, 그것이 바로 '사례'였다. 그것도 그들이 직접 본인들의 손으로 만든 사례.
바로 상관에게 보고할 때다. 직급이 나보다 높은 상관, 특히 그 상대가 임원이라면 아무리 객관적인 숫자, 사례라 하더라도 크게 파워를 갖지 못한다. 임원은 숫자, 사례보다도 본인보다 더 위에 있는 대표이사, 오너의 말에 더 귀 기울인다. 특히 오너의 생각은 숫자, 사례보다는 본인 개인의 취향, 라이프스타일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결국 임원도 월급쟁이 이기에...
숫자, 사례는 유일하게 나를 지켜줄 무기이자 방패다. 때로는 칼이 되어 상대를 공격할 무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방이 나를 공격해 올 때 나를 지켜 줄 방패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 쓸 지는 본인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