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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트 Feb 27. 2023

"뭐든 다 잘해", 세뇌당하는 노예들

노예가 노예인지 모르는 건 '죄'다

아아남씨는 뭐든 다 잘해

처음에는 좋았다. 다 잘한다는 건 나에게 어릴 때부터 따라오던 일종의 훈장과도 같았다. 운동도 공부도 곧잘 했던 나는, 무엇이든 다 잘한다는 게 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데 유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많은 주변 사람들, 심지어 학교 선생님들도 그렇게 칭찬해주시곤 했다. 


"너는 뭘 해도 잘할 거야." 그것만큼 무서운 칭찬도, 피해야 할 칭찬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며칠 되지 않았다.




다 잘한다는 건 특출난 게 없다는 뜻이다

이것도 저것도 시키면 곧잘 하네... 라는 뜻의 '다 잘한다'는 정작 뛰어난 한 가지가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학창 시절 공부를 정말 잘하는 친구에게는 '저 친구, 공부 하나는 정말 잘해'라고 하지만, 반에서 공부도 운동도 적당히 중상위권을 유지하는 친구에게는 '쟤는 다 잘하는데, 특별히 뭐 하나 잘 난 건 없어' 라는 아쉬움의 피드백으로 남는다. 


부모도 할 말은 있다, "저런 애를 어떻게 한 가지만 시켜요?"

그렇다. 특출난 게 없는 아이에게 어느 한 가지의 길을 학창 시절부터 강요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일단 여러가지 다 손대고 있으면서, 그러다 어느 순간 잘하는 한 개의 재능이 빛을 발하면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스탠스다. 


그러나 결국 부모의 '모두 잡기' 신공이 결국 아이가 특출난 한 분야로의 진출을 가로 막는 아주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해 보았는가? 분명 초등학교 고학년까지는 실력이 고만고만 했던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엄청난 실력 차이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중1 넘어가기 전 어학연수를 떠나 영어공부만 하고 온 아이와, 겨울 선행학습반에 들어가 국영수를 공부한 아이 중 어떤 아이가 더 뛰어난 성과를 보일까? 


외국에서 어학연수를 한 아이는 영어라는 무기를 가졌지만, 국영수를 모두 쥐고 있었던 아이는 국영수 중 어떤 것에도 뛰어나지 못한 채 또다시 중상위권의 그저 그런 성적에서 허우적 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전교 1-2등을 하는 아이는 국영수 라는 모든 과목을 잘 하는 것이 '시험 공부'에 특화된 본인 만의 한 가지 특기이므로, 이는 번외로 한다)




대기업은 다 잘하는 사람을 원한다

아니, 더 정확히는 뭐든 '적당히' 할 줄 아는 사람을 원한다. 정말 특정 분야에 잘하는 사람은 외부 '용역 계약'을 통해 얼마든지 계약직, 프리랜서 또는 외주의 형태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다. 


밖에서 그림 그리는 업무만 수주 받아 365일 내내 그 일만 한 디자이너는 당연히 대기업에서 사무업무를 보는 '사무용 디자이너'보다 실력이 특출날 수밖에 없다. 광고/마케팅을 잘 하는 사람은 본사 마케팅팀 직원 소속이기보다 다양한 기업들의 홍보/PR 담당을 수행한 대행사 직원에 속한 사람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처럼. 


대기업이 가장 원하는 조직, '순환근무제'

대기업은 적당히 할 줄 아는 인재를 가장 쉽고 편하게, 그리고 오랫 동안 사용하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재능으로 대체 불가한 능력을 지닌 인재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오히려 순환근무제를 통해 이 팀, 저 팀 돌며 다양한 업무를 해 본 직원을 양성하여, 회사 여러 파트의 직원들이 이직, 퇴사를 하면서 발생하는 공백을 해당 직원이 대체, 보완해주길 바란다. 대기업의 Risk-hedging Strategy, 즉 위험관리 전략이다.




대기업 갈까, 중소기업 갈까, 아니면 사업할까

뭐든 다 잘하는 사람은 대기업 가도 되고, 중소기업 가도 된다. 어차피 이래나 저래나 남 밑에서 일하는 건 마찬가지다. 다만 대기업은 내 앞에 밀린 똥차들이 많은 대신 안정적 조직 구조로 귀찮은 일들을 처리하는 데서 조금은 자유로운 장점이 있다. 중소기업은 체계도, 시스템도 없지만 적당히 잘하는 내 능력이 노력과 시간의 투입이 많으면 많을수록 빛을 발하여 빠른 승진과 인센티브를 보장받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특출난 나의 장점, 강점을 만드는 것과 상반되는 조직임에 틀림 없다.


내 무기를 가지려거든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나만의 무기, 재능, 특기를 가지려거든, 내 24시간을 오로지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에 쏟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남이 나를 채용하지 않고, 내 존재 자체가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는. 내가 어디에 있느냐, 어느 회사를 다니느냐에 따라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역할이 곧 나를 정의하는 그런 위치에 서야 한다. 


거창하게 사업가, 소박하게 프리랜서라 하지만, 그 본질은 모두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데에서 결을 같이 한다. 언제까지 허울 좋은 '다 잘해' 칭찬만 받으며 노예로 살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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