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가 노예인지 모르는 건 '죄'다
아아남씨는 뭐든 다 잘해
처음에는 좋았다. 다 잘한다는 건 나에게 어릴 때부터 따라오던 일종의 훈장과도 같았다. 운동도 공부도 곧잘 했던 나는, 무엇이든 다 잘한다는 게 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데 유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많은 주변 사람들, 심지어 학교 선생님들도 그렇게 칭찬해주시곤 했다.
"너는 뭘 해도 잘할 거야." 그것만큼 무서운 칭찬도, 피해야 할 칭찬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며칠 되지 않았다.
이것도 저것도 시키면 곧잘 하네... 라는 뜻의 '다 잘한다'는 정작 뛰어난 한 가지가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학창 시절 공부를 정말 잘하는 친구에게는 '저 친구, 공부 하나는 정말 잘해'라고 하지만, 반에서 공부도 운동도 적당히 중상위권을 유지하는 친구에게는 '쟤는 다 잘하는데, 특별히 뭐 하나 잘 난 건 없어' 라는 아쉬움의 피드백으로 남는다.
그렇다. 특출난 게 없는 아이에게 어느 한 가지의 길을 학창 시절부터 강요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일단 여러가지 다 손대고 있으면서, 그러다 어느 순간 잘하는 한 개의 재능이 빛을 발하면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스탠스다.
그러나 결국 부모의 '모두 잡기' 신공이 결국 아이가 특출난 한 분야로의 진출을 가로 막는 아주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해 보았는가? 분명 초등학교 고학년까지는 실력이 고만고만 했던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엄청난 실력 차이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중1 넘어가기 전 어학연수를 떠나 영어공부만 하고 온 아이와, 겨울 선행학습반에 들어가 국영수를 공부한 아이 중 어떤 아이가 더 뛰어난 성과를 보일까?
외국에서 어학연수를 한 아이는 영어라는 무기를 가졌지만, 국영수를 모두 쥐고 있었던 아이는 국영수 중 어떤 것에도 뛰어나지 못한 채 또다시 중상위권의 그저 그런 성적에서 허우적 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전교 1-2등을 하는 아이는 국영수 라는 모든 과목을 잘 하는 것이 '시험 공부'에 특화된 본인 만의 한 가지 특기이므로, 이는 번외로 한다)
아니, 더 정확히는 뭐든 '적당히' 할 줄 아는 사람을 원한다. 정말 특정 분야에 잘하는 사람은 외부 '용역 계약'을 통해 얼마든지 계약직, 프리랜서 또는 외주의 형태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다.
밖에서 그림 그리는 업무만 수주 받아 365일 내내 그 일만 한 디자이너는 당연히 대기업에서 사무업무를 보는 '사무용 디자이너'보다 실력이 특출날 수밖에 없다. 광고/마케팅을 잘 하는 사람은 본사 마케팅팀 직원 소속이기보다 다양한 기업들의 홍보/PR 담당을 수행한 대행사 직원에 속한 사람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처럼.
대기업은 적당히 할 줄 아는 인재를 가장 쉽고 편하게, 그리고 오랫 동안 사용하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재능으로 대체 불가한 능력을 지닌 인재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오히려 순환근무제를 통해 이 팀, 저 팀 돌며 다양한 업무를 해 본 직원을 양성하여, 회사 여러 파트의 직원들이 이직, 퇴사를 하면서 발생하는 공백을 해당 직원이 대체, 보완해주길 바란다. 대기업의 Risk-hedging Strategy, 즉 위험관리 전략이다.
뭐든 다 잘하는 사람은 대기업 가도 되고, 중소기업 가도 된다. 어차피 이래나 저래나 남 밑에서 일하는 건 마찬가지다. 다만 대기업은 내 앞에 밀린 똥차들이 많은 대신 안정적 조직 구조로 귀찮은 일들을 처리하는 데서 조금은 자유로운 장점이 있다. 중소기업은 체계도, 시스템도 없지만 적당히 잘하는 내 능력이 노력과 시간의 투입이 많으면 많을수록 빛을 발하여 빠른 승진과 인센티브를 보장받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특출난 나의 장점, 강점을 만드는 것과 상반되는 조직임에 틀림 없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나만의 무기, 재능, 특기를 가지려거든, 내 24시간을 오로지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에 쏟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남이 나를 채용하지 않고, 내 존재 자체가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는. 내가 어디에 있느냐, 어느 회사를 다니느냐에 따라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역할이 곧 나를 정의하는 그런 위치에 서야 한다.
거창하게 사업가, 소박하게 프리랜서라 하지만, 그 본질은 모두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데에서 결을 같이 한다. 언제까지 허울 좋은 '다 잘해' 칭찬만 받으며 노예로 살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