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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트 Apr 15. 2023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Ep 3. 임원에게 던진 대리 나부랭이의 한마디


임원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앞서 <Ep 2, https://brunch.co.kr/@paradishift/306>에서 언급한 것처럼, 임원은 내 보고서 초안이 다 마음이 들지 않았다. 본인이 항상 쓰는 폰트 종류, 글자 크기가 있는데 그걸 쓰지 않아서 싫었던 것이 첫번째, 그리고 보고의 목적상 'Dry하고, 덤덤하게' 만들어야 하는 보고서가 적잖이 화려한 색상과 디자인이 들어간 게 싫었던 게 두번째, 그리고 4개월간 해당 구성원들이 노력해서 준비한 내용들이 보고서 안에 충분히 담기지 않아 싫었던 게 세번째다. 오전에 그렇게 싫은 티를 팍팍 내고 가시더니, 다른 중요한 일들을 마치고 임원실로 돌아온 그 분이, 나를 갑자기 호출했다. "00 씨, 잠깐 들어와 봐요"


보고서 초안이 난도질 당하다

초안으로 잡은 장표의 개수는 PPT 약 30여 장. 그러나 임원께서는 그 장표들을 풀컬로로 인쇄해 놓으시곤, 마음에 안 드셨는지 진한 검은 볼펜으로 'X, X, 삭제' 등으로 난도질 해 놓으셨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셨는지, 한 장, 두 장 설명하시면서 마음에 안드는 장표들을 나와 그분 사이에 던져놓곤 푸념하셨다. "내가 원한 게 이게 아닌데.." "내가 이런 뜻으로 이걸 말한 게 아닌데..." "내가 이걸 00임원한테 다 얘기했는데 왜 이게 반영이 안 된건지.." 


나는 가만히 들었다

이런 일이 한 두번도 아니고, 임원분들 성향 맞춰서 보고서를 수십 수백번 수정하는거야 도가 텄다. 매번 보고 한번 두번이 본인들 밥줄이 달린 문제니, 폰트 하나, 가로 세로 정렬 하나 맞추는 거야 뭐 어떻게든 다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자 하니, 본인이 원하는 것들이 단순히 그런 것들을 넘어서는 것들이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각 계열사들이 모아 온 내용들에서 핵심과 요지를 뽑아 정리하고, 또 그 와중에 세부적인 디테일들은 놓치지 않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라는 주문이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지, 불과 2일 된 나에게. 아직 이 보고서 내용 파악도 되지 않은 나에게, 4개월의 모든 내용을 면밀히 파악하고, 심지어 보고서에 완벽히 녹여내라는 주문은 과히 지나친 듯 보였다.


임원에게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듣다가 듣다가 나도 한계치에 다다랐다. 그리곤, 계속 불평을 쏟아내는 임원의 말을 끊으며 한말씀 던졌다. "저, 임원님."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임원이 답했다 "그래 말해봐". 


"말씀하신 모든 내용들 다 숙지했고, 잘 알겠습니다. 보고의 취지도, 무엇을 이번 보고에 담고자 하시는지 그 의미도 알겠습니다. 다만, 잘 아시다시피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지 불과 2일 된 저에게, 방금 말씀주신 내용들을 모두 다 담아내라고 하시는 것은, 아무리 밤을 새고 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역량을 뛰어넘는 것이고, 특히나 계열사별로 모두 전문적, 기술적 내용들을 담고 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보다 해당 내용을 검토한 담당자들이 정리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인 방향성이 다 나와있고 그것을 2주 안에 정리한다고 하면 제가 충분히 역할 수행을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 방향성도 없는 보고서를 내용 작성과 요약, 그리고 파이널 보고서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저의 과업이라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마스크도 벗고 생활하는 요즘, 나도 모르게 표정관리도 되지 않아 화난 얼굴을 그대로 임원 앞에서 드러냈다. 


임원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특유의 미소, 웃음은 잃지 않은 채, 약 10초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미소의 가로길이가 더 넓어지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럴 수 있겠네. 오케이" 




그리고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냥 원래 내 자리로 돌아가더라도, 할말이 없었다.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말했기에 부끄러웠지만 후회는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부끄럽지 않았다. 뭔가 다들 싸질러놓은 똥을 어느 누구도 치우지 않고, 내가 오기만을 기다린 것 같았다. 너무도 화가 났고, 이 일로 뭔가 나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결과가 온다 하더라도, 나는 다시 그 자리가 오더라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진정이 되지 않은 나는, 밖으로 나가 사무실 주변을 1시간 걸었다. 뭐지...? What does that mean to me? Who brought this to me? Why... 이 생각만 반복하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다들 노트북, 모니터를 보며 자기 일을 하고 있었고, 더 중요한 건 내 초안이 아니라, 임원의 피드백을 반영한 '중간 보고버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중간 버전? 뭐 어떻게 만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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