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해변

2022년 12월 13일

by 천우주

태풍이 몹시도 몰아치던 어느 다음날,

해변엔 온갖 잔해들이 넘쳐 나뒹굴었다.


밤새 몰아친 비와 바람이 세상의 대기를 태초로 돌려놓은 듯 하늘이 맑고 투명한 빛을 세상에 내려 비칠 때,

해변의 온갖 상처들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어디선가 부러져 날아온 나뭇가지와 잔해들, 파도가 가져다 놓은 죽어버린 해초들과 어패류의 사체들,

그리고 사람이 만든 물건들 -간판, 풍선, 인형, 옷가지, 그물, 부표, 플라스틱, 병 따위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사람이 만든 것임에 분명한 그것들 - 은 해변 곳곳에 박히고 나뒹굴고 널브러져 있었다.

하늘과 대기는 마치 이제 막 천지창조를 끝낸 듯 신성하였고

해변은 마치 지옥을 연상시키듯 더럽고 불쾌하고 무자비했다.


태풍은 신과 악마의 전쟁이었던가?

신과 악마의 전장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면 아마도 이 해변이 그 답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신이 승리했는지 악마가 승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누가 승리하였든 해변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는 것.

아니 영원 앞에선 어느 것이나 보잘것없는 것.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시간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흘렀고 두 번 다시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으리라 확신했었던 이 전쟁터에도 다시 평화와 안식이 찾아왔다.

끊임없이 밀려들고 빠져나가는 물결은 자신이 가져다 놓은 것을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돌려보냈고 사람이 만든 버려진 물건들은 사람이 다시 어딘가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평화.

조용히 철썩이는 파도와 슬며시 밀려들었다 스르르 빠져나가는 하얀 거품.

한가롭게 다니는 사람들과 먹이를 찾아 빙글거리는 갈매기들.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빠져나가는 조용한 아침.

해변에 새겨진 어제의 잔잔한 자국들도 이제는 없다.

바다가 밀고 들어오는 해변의 물살의 경계에 서서 나는 상처를 내듯 굴고 길게 무작위의 선을 그어본다.

바다가 상처의 선들 위로 물결을 보낸다.

한번, 두 번...

인사하듯 조용히 물결들이 다녀갈 때마다 상처의 흔적들도 조금씩 옅어져 간다.

머지않아 흔적들은 모두 사라지고 해변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화로운 모습을 찾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도 해변이 있다.

언젠가 그곳에도 태풍이 몰아쳤었고 전쟁터와도 같은 상처를 남겨놓았다.

다시는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폐허와 같은 상처들은 시간의 파도에 의해 흩어지고 풍화되었으며 사람들이 만든 상처들 역시 사람들이 모여들어 치워 주었다.

내가 남긴 크고 작은 상처와 흔적들도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남아있는 것들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나는 안다.

지금의 평화로운 해변엔 언젠가 다시 태풍이 몰아칠 것이고

다시 누군가가 새긴 흔적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 모든 흔적들이 결국엔 사라질 것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은 곱고 고운 모래로 천천히 아름답게 풍화되어 갈 것을.


그리고 또 나는 감사한다.

시간과 물결에, 더불어 태풍과 폐기물과 사람들과 나에게.

상처는 살아 있음을 일깨워주고

회복은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일깨워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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