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1일
늦은 저녁을 먹고 부른 배를 느끼며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추위는 어제보다 누그러져 집 밖을 나간다는 게 한결 덜 두려웠지만 늦은 퇴근으로 지친 몸을 다시 밖으로 보내기가 내키지는 않았다.
시계는 벌써 열한 시를 넘겼다.
그래도 웬일일까.
오랜만에 괜스레 나가고 싶어졌다.
그냥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밤에 나가 노래나 몇 곡 들으면서 동네나 한 바퀴 돌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종량제와 재활용 쓰레기를 각각 한 손에 들고 보너스로 음식물 쓰레기까지 챙겼다.
추위가 누그러졌다지만 대비는 철저해야 하는 법.
파자마 위에 다시 바지를 입고 플리스 재킷에 파카까지 입은 후 비니모까지 덮어쓰니 마음이 든든해진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얼어 죽진 않으리라.
평화롭게 쓰레기를 순서대로 처리하고 익숙한 길을 걸어간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담배를 하나 태우고 다시 터덜터덜 걸어간다.
랜덤 재생으로 틀어놓은 음악 앱에선 낯선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낯설지만 멜로디들이 좋다.
AI가 내 취향을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다.
그냥 걸을 땐 낯선 노래들이 좋다.
괜스레 따라 흥얼거릴 필요도 없고 가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 그냥 걸을 땐 낯선 노래만 한 게 없다.
길을 걸으며 얼큰하게 취해 돌아가는 아저씨도 하나 보았고 나보다 커다란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여자도 하나 보았다.
택시를 타는 손님도 보았고 택시에서 내리는 손님도 보았다.
밤마실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지 트레이닝복 차림의 아주머니도 한 분 보았다.
공원을 지날 때 벤치가 보여 잠시 앉았다.
조금 차갑지만 시원한 밤공기가 참 좋다고 느껴졌다.
저만치 멀리엔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 불빛과 아파트들의 불빛들이 예쁘게도 빛나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인도 안쪽에 선명하게 떨어진 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선명한 주황색 껍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참 예쁘게도 생긴 귤이다.
저리도 예쁜 귤을 누가 살포시 가져다 놓았을까?
예쁨을 나누려고 그랬을까?
실수로 두고 갔을까?
저렇게 반짝반짝 예쁜 녀석을 버리고 갈 사람은 없을 건데 어쩌다 저 예쁜 녀석이 여기에 놓여졌을까?
혹시 동화 속 얘기처럼 세상을 향해 모험을 하는 귤은 아닐까?
아니면 남모르는 어떤 슬픈 사연이 있어 저렇게 홀로 인도 한 구석에 외롭게 남겨졌을까?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나 생생한 귤이다.
그래도 왠지 건드리지는 말아야 할 것 같다.
귤에겐 귤의 삶이, 나에겐 나의 삶이 있으니.
이렇게 스쳐 지나가며 서로의 존재에 잠깐의 눈인사를 주고받는 게 이 인연의 최선이겠지.
귀에선 어쩐지 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노래가 나온다.
가사는 알 수 없지만 멜로디가 마치 귤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폰을 꺼내 재생되는 노래를 확인해보니 Wolf Larsen의 Wolf Larsen란 곡이다.
잔잔한 기타 소리와 몽환적인 보컬의 목소리가 약간은 쓸쓸하고 약간은 슬프지만, 담담하고 꿋꿋하게 들려온다.
상처를 가졌지만 그 상처를 껴안고 살아간다고 말하는듯하다.
꿈이 있었지만 지금은 꿈이 사라져 버렸다고
그럼에도 살아간다고,
지쳐 멈춰있지만 쓰러진 건 아니라고
잠시 쉴 뿐이라고,
괜찮지 않지만
그럼에도 괜찮다고,
희망을 잃었지만
아직 웃음은 남아있다고,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는 걸 알고 있다고
나도 그렇게 살아간다고
그렇게 담담하게 얘기하는 듯하다.
실제 가사는 전혀 아닐지도 모르지만 밤 걷기와 나와 귤을 생각하니 왠지 그 순간 나에겐 그렇게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