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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덕 Jan 08. 2023

패터슨(2017)

출처: 네이버 영화

패터슨(2017)

감독/각본: 짐 자무쉬

출연: 애덤 드라이버, 골시프테 파라하니, 베리샤바가 헨리, 리즈원 맨지 등

러닝타임: 118분


패터슨 시에 살며, 23번 패터슨 버스를 모는

시인 패터슨 씨의 이야기.


매일 아침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볕을 따라 패터슨은 눈을 뜬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아내는 여신처럼 곱게 잠들어 있고 때론 잠결에 일어나 꿈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햇볕은 일출부터 살금살금 패터슨의 집까지 다가가 벽을 타고 창을 넘어 그와 아내의 몸에 닿으며 조용히 속삭였을 것이다.


속삭임이 꼭 말일 필요는 없다.

아주 잠깐의 부드러운 터치,

당신을 바라보는 나의 눈,

슬쩍 흔들리는 그림자, 늘 거기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풍경.

속삭임은 이렇게 감정과 감각으로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얘기한다.


침대 엽 협탁에는 책이, 오른편 의자에는 깨끗하게 세탁되어 잘 개어진 옷이 한 벌 놓여있다.

패터슨은 잠이 든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일어나 조용히 신발을 신고 1층으로 내려가 커피를 내리고 간단한 아침을 먹고 도시락을 챙겨 출근길을 나선다.

아마 수십 수백 번은 다녔을 그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길을 그는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때때로 호기심의 시선으로 걸어가 직장에 이른다.

그리고 버스를 운행하기 전 운전석에 앉아서 자신의 비밀노트에 시를 써 내려간다.

하지만 시를 적는 일은 정비담당으로 보이는 동료의 등장으로 중단되고 동료와의 짧은 안부인사와 함께 패터슨의 운행은 시작된다.

시 쓰기가 도중에 중단이 되어도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

감정은 여전히 몸속에 있고 글들은 여전히 머릿속에 있으니.


그는 노선을 운행하며 사람들을 태우고 사람들을 내리며 익숙한 길들을 익숙하게 지나간다.

가끔 마주 오는 동료 버스 드라이버와 잠깐의 경적과 손짓으로 인사를 나누기도 하며 승객들의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이기도 하고 풍경들을 잠깐잠깐 눈여겨보기도 한다.

어딜 보나 익숙한 풍경이며 익숙한 동작들,

하지만 비슷해도 똑같지는 않다.

마치 쌍둥이들처럼.

카를로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처럼.


점심시간엔 작은 공구통 혹은 우편함처럼 생긴 녹색의 도시락 가방을 열고 아마도 아내가 싸주었을 점심을 혼자서 조용히 먹으며 다시 시를 써 내려간다.

우편함 혹은 공구통처럼 생긴 이 도시락 가방은 그 짙고 고전적인 녹색과 모양 탓에 눈에 잘 띈다.

어쩌면 덩치 큰 패터슨이 들어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도시락 가방의 뚜껑 안쪽엔 아내가 넣었음직한 사진이 있고 그 사진들은 늘 다른 사진으로 바뀐다.

여러 장의 같은 사진을 돌려가며 사용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괜찮다.

오후 운행을 마치고 패터슨은 출근할 때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거꾸로 되짚어 집으로 돌아온다.

작고 평범한 집 앞에는 오래되어 칠이 좀 벗겨진 흰색 나무로 만든 우편함이 있는데 그가 돌아올 때면 왠지 종종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우체통을 확인하고 조금은 귀찮은 듯이 우편함을 바로 세운다.

혹시나 누가 이런 짓을 했나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곧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간다.


집에는 늘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아름다운 머리칼과 환한 미소를 가진 아내는 늘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커튼에 패턴을 넣기도 하고 벽을 칠하기도 하고 옷에 문양을 넣기도 하고 때론 컵 케이크를 굽기도 한다.

아내 로라는 검정과 하양을 기본으로 하는 원형 패턴을 즐겨 사용하는데 마치 장난스러운 요정이 집에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요정과 시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아내와 저녁 식사를 마치면 그는 반려견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목적지는 언제나 동네에 있는 작은 술집이다.

그는 언제나 그곳에 들러 맥주를 한 잔 마시고 귀가를 한다.

그리고 다시 아내와 함께 잠이 든다.

아주 옅은 맥주 향을 풍기며.


패터슨의 일과는 그렇다.


'오전에 일어나 회사를 가고 퇴근 후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맥주를 마시고 돌아와 잠이 든다.'


실로 간단하고도 반복적인 이 생활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마치 우리는 가만히 있지만 우리의 세포와 분자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처럼.

그것은 드라마틱하지 않은 작은 변화들이지만 그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기쁨을 찾고 새로운 좌절을 맞으며 또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패터슨은 러닝타임인 2시간 동안 시를 쓰는 버스 드라이버인 패터슨의 일주일간의 일과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오히려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을 주기까지 한다.

그 이유엔  음악적 요소, 배우의 연기등 다양한 것이 있겠지만 일상의 작은 변화들이 곳곳에 숨어있기에 그러하다.


시인은 사물의 깊이를 바라보고 사물의 속삭임을 알아채는 사람이다.

빨간 담벼락을 사선으로 가로지는 햇빛, 놀이터에서 뛰는 아이들, 식탁 위 놓여있는 작은 성냥갑, 흘러내리는 강물들과 아치형의 다리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하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것들이 언어 이외의 속삭임으로 얘기하는 것을 다시 벼르고 벼른 언어를 사용해 들려준다.

그것이 시인이다.

그래서 시의 언어는 어느 하나 대충 쓰여진 것이 없다.


영화를 보고 나면 왠지 모르게 글이 적고 싶어지고 산책을 나가고 싶어 진다.

지루한 일상이 사실은 지루하지 않음을 알게 해 준다.

시가, 기쁨이, 희망이, 사랑이, 행복이, 아름다움이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알게 해 준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것을 발견하면 무심하고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소리 내면 된다.



아-하



패터슨에 살며 23번 패터슨 버스를 모는

시인 패터슨 씨의 '풋'하며 웃는 얼굴이 떠올라

나도 '풋'하고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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