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04일
지난 휴일 오랜만에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다녀왔다.
공원엔 겨우내 웅크린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렸고 마른 화단과 가로수 여기저기서 풀들과 잎순들도 북적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봄은 식물만 깨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도 깨우나 보다.
바람이 약간 차가웠지만 햇살은 기분 좋게 따뜻했다.
얇은 스웨터 위로 봄햇살이 내려앉고 온기가 포근히 온몸을 감싸며 퍼져나간다.
입가에 저절로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아.. 봄날의 온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해봤었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 후엔 그저 한순간의 '온기'정도로 남고 싶다고.
간혹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추운 겨울날, 당연히 추워야 하지만 왠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온기가 들 때.
그래서 사람들이 다 춥다고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고개를 파묻을 때 그들을 약간은 의아하게 바라보며
'뭐가 춥다고 그래? 하나도 안 추운데' 라며 말할 때.
어쩌면 그럴 땐 누군가의 영혼이 따뜻함으로 남아 잠시 내게 스며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도 그런 온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었다.
그렇지만 겨울날의 온기만이 아니라 봄날의 온기도 괜찮을 것 같다.
옷 위로 느껴지는 햇살과 옷 안으로 들어오는 따스함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위로하는 듯하다.
괜찮다, 다 괜찮다고
다 괜찮으니 미소가 떠오를 수밖에.
위로를 받는 건 나만이 아닌 것 같았다.
공원에 북적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밝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 아이들과 노는 사람들,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몇 안 되는 관객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사람들, 다들의 얼굴이 봄날 같다.
그중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둘러보며 재밌게 얘기를 나누는 어떤 할머니들의 얼굴이 가장 봄날 같았다.
겨우내 볼 수 없었던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어느새 쑥들도 군데군데 한껏 올라와 있었다.
너희들은 도대체 어디서 있다가 이렇게 불쑥 나타났니?
다들 안부를 묻지 않았는데도 어딘가에서 참 잘 지내다가 이렇게도 나왔구나.
사람들도 풀들도 꽃들도 내가 안부를 묻지 않아도 모두 제각각 자신의 자리에서 잘 살아왔었구나.
누구의 안부 없이도 모두들 기특하게 잘 지내왔었구나.
그리고 봄날이 오자 어디선가 마법처럼 불쑥 나타나 아무 안부도 묻지 않은 내게 오히려 안부를 묻는다.
잘 지냈니? 이번 봄에도 이렇게 볼 수 있어 참 좋다
갑자기 영화 '러브레터'가 생각이 났다.
'오겡끼 데스까?'
'와타시노 겡끼 데스"
영화의 스토리도 배우들의 이름도 가물거리지만 설원에서 그녀가 왜 그렇게 혼자 소리치며 안부를 물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나도 가끔은 그들에게 안부를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잘 지내니 너도 잘 지내라고.
소리 없는 서로의 안부 뒤 오늘 그 공원 근처를 지나다 문득 다른 안부가 생각이 났다.
봄날에 닿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안부였다.
자라나는 풀들 사이, 피어나는 꽃순 사이, 지나가는 사람 사이.
그곳에 존재하는 어떤 부재.
봄날의 풍경이 되지 못하고 사라진 모든 것들.
사라진 것조차 알아차릴 수 없는 그런 모든 것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버지는 힘없이 문간에 기대 기댄 몸보다 더 힘없는 목소리로 저 멀리 지나가는 차들을 보며 말했었다.
'저 차들은 내가 없어도 잘 다니겠지?'
그렇다. 아버지의 말처럼 차들은 아버지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도로 위를 씽씽 달렸으며 그들 중 누구도 당신의 부재를 알지 못했다.
그것이 서운하셨었나 보다.
하지만 서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제는 나보다 더 잘 아시고 계시겠지.
그렇지만 만일 알지 못하는 누군가 그의 부재를 위해 잠시의 안부를 전했단 걸 알았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그래서 오늘은 이번 봄날에 부재한 모든 것들에 잠시 안부를 전해본다.
잘 지내십니까?
여기는 괜찮습니다.
거기도 괜찮겠지요?
부디 맞이했던 모든 봄의 따스한 기억들만 가지고
따스한 휴식을 취하시기를
봄날의 따뜻함이 마치 비가 되어 내리는 듯하다.
나도 언젠가 저런 온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