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시인의 '옛 수첩에는 아직'을 읽고
옛 수첩에는 아직
-류시화
눈이 그녀의 모국어로 무엇이냐고 묻자
공작새보다 둥근 눈을 깜박이며
아크라고 했다
그 눈을 들여다보며 별을 묻자 그녀는
순다르 타라라고 했다
아름다운 별이라고
그리고 덧붙였다
밝음은 로스니, 어둠은 안데라
세 개의 모음으로 된 내 이름을 소개하고
일곱 개의 모음으로 된 그녀의 이름을 외우면서
서툰 글씨로 그 이름을 다 쓸 수 있기도 전에
우리의 만남은 끝이 났다
더 많은 모음을 가진 그녀의 아버지가
생소한 자음을 가진 늙은 천민에게
그녀를 시집보냈고
그 후로 그녀의 소식을 알 길 없었다
나무는 페러
연못은 탈라브
운명은 바갸
작별은 비다이
당신을 사랑해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런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라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피르 밀렝게라고 했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새로운 모음들을 가진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내 그리움의 수첩에는 아직 묻지 못한 단어들이
이토록 많은데
바람은 하와
비는 바리샤
그녀가 좋아하던 파란색은 닐라
가슴은 딜
슬픔은 두키
영원은 아마르
더 가까이서 깜박이며
지친 새처럼 내려오는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별은
시타라
둥근 슬픔이 있을까?
너무 오래돼 닳고 닳아 둥글어진 슬픔이 있을까?
사내는 잊었던 오랜 옛 수첩을 뒤적이다 '흔적'을 발견했을 것이다.
잊고 있었지만 잊을 수 없는 흔적.
그도 옛 수첩을 보며 나처럼 눈물을 흘렸을까?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눈물이 터져 나왔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도 그랬다.
이 글을 적느라 이 시를 다시 읽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
처음처럼 터져 나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슬픔은 같다.
내가 이 시를 백 번을 읽고 천 번을 읽는다면 담담한 마음이 될 수 있을까?
울고 또 울어 슬픔이 닳고 닳아 둥글어지면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내는 이제 회한의 슬픔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둥근 슬픔을 안고?
어떤 것들은 삶에 흔적을 남긴다.
시간은 강력해 우리를 억지로 떠밀어 앞으로 나가게 하지만 살아오면서 느꼈던 어떤 강렬한 순간들은 우리 영혼의 어떤 부분을 그곳에 그대로 남겨둔다.
앨범 속 오래된 사진처럼.
그래서 때때로 마음의 앨범을 들춰내 남겨졌던 영혼의 흔적을 우연히 찾으면 잊은 줄만 알았던 그때 그 시절로 순식간에 돌아가버린다.
시간이 정지된 곳에선 모든 것이 그대로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곧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아간다.
시간에 밀려, 삶에 밀려
살아간다는 건 그런 것인가 보다.
내 영혼의 조각들을 과거에 조금씩 남겨둔 채 남은 영혼을 끌어모아 어떻게든 다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새로운 영혼의 조각들로 다시금 채워나가는 것.
슬픔이 오래돼 닳고 닳으면 그것이 희미해지는 게 아니라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공작새 같은 아름다운 눈을 깜박이며 사랑해란 말대신 자신을 바라보던 그 아름다움만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순다르 타라 처럼.
영원히.
나는 류시화 시인의 글들을 좋아한다.
자신의 인도 여행기를 다룬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읽었을 때부터 그의 글들이 좋았다.
그의 글들은 생생하면서도 솔직하다.
아픔도 실수도 있는 그대로 얘기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다가온다.
특히 글의 생생함이 좋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머릿속에서 장면과 상황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이 시를 읽을 때도 그랬다.
짧은 시 속에 담긴 그들의 사랑과 이별과 그리움의 시간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지나갔다.
그래서 눈물이 텨져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는 류시화 시인의 제3 시집인
'나의 상처는 돌 / 너의 상처는 꽃'
에 실려있는 시 중 하나인데 이 외에도 사랑과 그리움에 관한 많은 시들이 실려있다.
제목처럼 돌과 꽃에 관한 시들이다.
우측 상단에 그려져 있는 두 손을 꼭 맞잡고 있는 표지 그림도 참 좋다.
펜으로 거칠고 둥글게 그려낸 그림인데 돌과 꽃이 된 상처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 그림이 너무 좋아 예전에 그것에 관해 글을 쓴 적도 있었다.
나만 보는 카카오스토리에 있는 글인데 언젠가 그 글도 브런치에 올려보고 싶다.
(카카오 스토리에 600개 정도의 일기 같은 글들을 썼었는데 모두 비공개라 한 번 더 다듬어 다시 올려보고 싶다)
책의 다른 시 중 '첫사랑의 강'이란 시에서 시인은 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때 나는 알았지
어떤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우리가 한때 있던 그곳에
그대로 살고 있다고
떠나온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