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잠시 다녀가다
늦게 잠을 잔 것에 비하면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일찍이라곤 해도 9시.
모처럼의 휴일이라 뭘 할까 망설이다 운동을 하러 센터로 가기로 했다.
어제 흐렸던 거에 비하면 날씨는 좋다.
여유롭게 반바지와 반팔티, 실내용 운동화를 챙겨 센터로 향했지만 웬걸.
오늘이 휴일이랜다.
'아뿔싸...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었지...'
그제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눈치를 채곤 이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을 오전 나절에 얼른 해치우고 산책을 나선다.
발길 닿는 데로 집 근처를 돌아다니다 푸릇푸릇해진 뒷동산 길을 넘어가 보기로 했다.
차를 타고는 지나 봤지만 걸어서 넘어보기는 처음이다.
오후 1시가 지나니 날씨는 더욱 좋아지고 기온도 높아졌다.
목덜미를 타고 땀이 흐른다.
뒷동산 길은 좁지만 차가 통행할 수 있게 아스팔트가 깔려있어 걷기엔 수월하다.
대신 도로폭도 좁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도 좁아 나름의 주의는 필요하다.
그래도 차량 통행이 많지는 않은 곳이라 조금만 신경을 써서 걷는다면 차도 나도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더구나 오늘은 다들 부처님을 찾아 절로 떠났는지 다행히 차량 통행이 평소보다 더 적다.
길을 올라서자 파란 하늘과 쨍한 구름과 짙은 녹색으로 변하는 잎들, 그리고 영산홍과 새소리가 나를 반긴다.
좋다
'좋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나를 위해 가끔이라도 좋은 것들을 보여줘야겠구나'란 생각이 문득 든다.
녹색과 꽃과 하늘과 구름과 새소리, 그리고 공기.
이런 것들이 내 안의 무언가를 편안하게 만든다.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차를 타고 지날 땐 보이지 않았던 소로가 하나 나타났다.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는 걸로 봐선 동산 위로 이어진 길 같아 올라가니 아무도 다니지 않은지 꽤 되었는지 포장된 길 위로 온갖 식물의 덩굴들이 군데군데 어지럽게 말라있었다.
풀과 마른 덩굴들을 지나쳐 조금 더 올라가니 이내 길은 끊어져 버렸다.
전봇대가 있는 걸로 보아 공사를 할 때 사용하던 길인가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이 되어버린 것 같다.
끊어진 길 넘어 풀을 헤치고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낮은 동산의 정상으로 가지 싶어 더 가보려다 참고 돌아선다.
실은 뱀이 나올까 무서웠다.
나올지 안 나올진 모르지만 왠지 스르륵 하고 풀 숲에서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뱀을 자주 봤으면 안 무서울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실제로 뱀을 본 건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 아직은 뱀이 무섭다.
갑자기 독사 얘기도 생각나고 어느 누가 뱀에 물려 쓰러졌다느니 안 좋은 일을 당했다느니 하는 기억들도 떠올라 정글 탐험은 깔끔히 포기하고 오던 길을 다시 내려갔다.
저는 뱀이 무섭습니다
덩굴길을 다시 되짚어 내려오니 아스팔트와 태양과 하늘과 공기가 나를 반긴다.
잠깐이었지만 정글(?) 탐험 후 다시 문명의 세계로 돌아오니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길을 조금 더 걷다 보니 고사목 하나가 나왔다.
어떤 나무이고 어떻게 고사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나무는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름답고 웅장하고 꼿꼿하게 서있었다.
어쩌면 뿌리가 산 아래까지 닿아있어 저 속에 생명의 한 가닥 정도는 미미하게 남아있을지도.
나무를 지나치자 저 멀리 산과 바다와 도시가 나타나고 우측으로 옛날 버스 차고를 그대로 개조해서 만든 카페가 보인다.
이제 중간쯤 온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존재했으니 존재한다.
카페가 있는 곳은 해안가 절벽이라 이곳에선 바다와 섬과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앞이 탁 트인 광활한 바다는 아니지만 만으로 되어있는 해안선과 작은 섬들, 그리고 도시들과 하늘이 풍경으로 펼쳐있는 아름다운 경치이다.
가끔 이곳에 올라 이렇게 풍경을 바라보기도 한다.
이번처럼 뒷동산 처음부터 끝까지 길을 따라 걸어 오기는 처음이지만.
해안가와 접한 난간을 따라 걸으며 풍경과 음악소리와 새소리를 듣는다.
낮게 깔린 구름 위로 떨어지는 햇빛이 아름답고 신비하다.
바람이 제법 시원해 흘렸던 땀들은 이내 말라가기 시작했다.
하늘, 도시, 구름, 바람, 새소리
한동안 그곳에 서서 풍경을 바라보았다.
휴일이었고 아무것도 할 게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마른 땀을 식히며 눈앞에 있는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나도, 너도 건강하고 행복하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나는 네가
건강했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건강했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 따로
또 혼자
언제 어느 때라도
행복하고 건강하고 잘 지냈으면
참 좋겠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갑자기 자비심이 넘치는 걸 보니 아마도 내 안에 부처님이 잠시 다녀가셨나 보다.
오신 김에 좀 더 오래 머물다 가셨으면 좋겠지만 워낙에 찾는 사람이 많은 바쁜 분이니 잠시 다녀가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겠지.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세상에 도움을 줄 만한 게 뭐가 있을지 잠깐 생각해 보았다.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나 하나 잘 지내는 걸 넘어 세상과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무언가가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봤지만 잘 모르겠다.
부처님께서 오신 김에 그런 것도 좀 가르쳐주고 가셨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건 그냥 내 숙제로 남겼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