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7월 18일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휴대전화에선 수시로 재난 안전문자가 울려댄다.
평소 일 때문에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지만 가는 곳마다 비가 온다.
이런 날 우산은 필수품이다.
강 약 중간 약을 제 맘대로 오가며 비를 뿌리는 날씨에 잠깐 비가 그쳤다고 우산을 두고 나갔다간 낭패를 당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우산은 참 고마운 물건이다.
자신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에 대해 성심을 다해 비를 막아준다.
비 오는 날 우산만큼 간편하고 든든한 물건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게 또 은근히 귀찮은 물건이기도 하다.
사람의 손은 두 개뿐이라 하나를 우산 잡는데 써버리면 쓸 수 있는 손이 하나 밖엔 남지 않는다.
평소보다 할 수 있는 일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더구나 한 손에 물건이라도 들고 있을 때 전화가 오면 상황에 따라 대략 난감해진다.
그런데 우산을 왜 쓸까?
그거야 젖지 않기 위해서지.
그럼 왜 젖지 않으려고 할까?
일상생활이 불편해지기 때문이지.
생각해 봐.
비를 맞으면 옷이 젖고 신발이 젖고 몸이 온통 다 젖어.
그렇게 회사를 가고 사람들을 만나고 밥을 먹고 장을 보고 한다고 생각해 봐.
물이 뚝뚝 떨어지는 차림으로 말이야.
거기다 건강에도 안 좋아.
몸이 온통 젖어있으면 체온이 급격히 내려가 쉽게 감기에 걸리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찝찝해.
젖은 양말을 하루종일 신고 있다고 생각해 봐.
젖은 속옷을 하루종일 입고 있다고 생각해 봐.
찝찝해 찝찝해 너무 찝찝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우산이 지겨워졌다.
어차피 퇴근했으니 사람들 만날 일도 없고 밥 먹고 장볼일도 없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 간편한 옷을 갈아입고 운동도 할 겸 길로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꼬마가 쏟아지는 비에 우산도 없이 용감(?)하게 나가는 아저씨를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아이의 시선 따윈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젖는다는 게 젖기 전엔 불안하지만 일단 한 번 크게 젖고 나면 편안해진다.
신발이 젖을까 양말이 젖을까 옷이 젖을까 하는 고민은 젖고 나면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자유로움이 올라온다.
우산에 구속되어 비를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 홀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빗속에서 젖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치트키 같은 것이다.
이미 젖어버리면 더 이상 비도 물웅덩이도 두렵지 않고 온갖 곳을 내 맘대로 다닐 수 있다.
그렇게 비가 내리치는 공원을 한 시간 정도 달렸다.
비가 쏟아지건 말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빗속을 달리는 건 즐거운 일이다.
사람 없는 넓은 길을 물을 철벅이며 달려 나가는 기분만큼 즐거운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더구나 여름 아닌가?
이처럼 비 맞기 좋은 계절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달리다 보니 문득 가지려는 이유가 '부족'해서라는 게 떠올랐다.
당연하다.
부족하니 가지려 하는 것이고 모자라니 채우려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가지고 있다면?
이미 채워져 있다면?
젖는 게 불편하고 싫으니 젖지 않으려 하는 것이지만 일단 젖고 나면 불편함과 싫음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듯 내게 아무것도 필요할 게 없다고 한다면?
필요한 건 이미 모두 가지고 있고 더 이상의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면?
모든 걸 가진 사람과 아무것도 필요 없는 사람 중 누가 진정한 가진 자 일까?
떠오르는 생각들을 내버려 둔 채 첨벙거리며 한 시간을 달렸더니 마음도 기분도 훨씬 좋아졌다.
스마트폰을 꺼내 빗속을 달린 자의 멋진 모습을 한 컷 찍어볼랬지만 웬걸, 물에 젖어 터치가 제대로 안 먹힌다. 잠금해제도 제대로 되지 않고 카메라 앱을 켜는 것도 어렵다.
게다가 혼자서 연출해 볼 각도가 도저히 나오질 않는다.
좋은 사진이란 게 그냥 기분대로 나오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서 신발이라도 한 번 찍어보았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갑자기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을 때,
그럴 때가 있다면 가끔 한 번은 비를 맞고 달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단, 너무 오래 달리면 건강이 상할 수 있으니 꼭 한 시간 내로 달리길 권한다.
(그리고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질 수도 있으니 바람막이나 긴 옷을 입는 걸 추천한다)
가끔 비 맞으면 탈모 온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데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나는 이미 20년 전부터 탈모에 달관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인 것이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고로 나는 강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