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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덕 Jul 16. 2024

복날

여름, 복(福) 많이 받으십시오 (2024. 07. 15)


점심을 한참 지나 더위속에 땀을 뻘뻘거리며 일을 하고 있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양손에 물건을 들고 이동하고 있던 터라 어렵사리 전화기를 꺼내 통화 버튼을 간신히 누른 후 땀으로 번득이는 볼따귀에 전화를 갖다 대고 어깨로 엉거주춤 받쳐 들어 전화를 받았다.


"어, 여보세요. 우짠 일이고?"

"그래, 뭐하노?"

"뭐하긴, 일하지"

"니는?"

"나도"

"별일 없나?"

"별일 없다"


이런저런 경상도식 안부가 간단히 오가고 그간 생긴 서로의 별일도 간략히 얘기한다. 목소리로 보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그저 조금 심심했나 보다. 날씨는 덥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는 오후의 시간이니 지루할만하다. 한참을 얘기하다 전화를 끊을무렵 문득 친구가 물었다.


"야 니 점심때 삼계탕 한 그릇 했나?"

"삼계탕? 아니. 돈까스 묵었는데"

"야야 오늘 초복이다. 내는 점심때 회사서 한 그릇 묵었다. 니도 저녁엔 삼계탕 한 그릇 해라"

"그래 알았다. 더븐데 건강 조심하고 담에 보자"

"오케이"

(대화는 경상도식이지만 마무리는 국제 사회의 일원답게 영어로 한다.)


전화를 끊고 폰을 주머니에 넣기 위해 볼따귀에서 가져와보니 액정이 온통 땀으로 흥건했다. 번들거리는 시커먼 화면을 보니 오늘이 복날이 맞긴 맞는 것 같았다. 오늘이 복날인지 친구가 알려주기까진 몰랐다. 전화기를 도로 주머니에 넣고 나니 갑자기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멀리서 말로나마 복날을 챙겨주는 친구가 있음이 새삼 고마워 나온 웃음이었다.

'그럼 저녁엔 삼계탕을 한 번 먹어봐?'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걸 어째? 나는 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찾아 먹지는 않는다. 치킨이든 백숙이든 삼계탕이든 닭볶음탕이든 닭갈비든 닭뭐시기든 말이다. 게다가 오늘은 출장을 나온 터라 제시간에 저녁을 챙겨 먹기도 어려워 초복이 가기 전 닭을 먹을 확률도 별로 없다.

통화를 끝내고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저녁 9시를 훌쩍 넘겼다. 예상대로 일이 늦게 끝나 삼계탕은 고사하고 편의점 도시락으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잠깐. 숙소 근처에 마트가 하나 있다. 나는 얼른 마트로 달려가 즉석조리 코너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삼계탕은 아니라도 치킨은 있을 터였다. 그곳으로 간 까닭은 내 비록 닭을 좋아하진 않지만 멀리서 전화해 준 친구의 성의를 봐서라도 기필코 닭껍질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역시!! 예상은 들어맞았다. 그곳엔 아직 싱싱한 치킨들이 진열대의 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앞에 몰려든 사람들이 너무 많다. 무슨 일인지 싶어 가까이 가보니 직원분이 할인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게 아닌가. 진열대 앞에 모여든 사람들은 달라지는 가격표를 짐짓 관심 없는 듯 곁눈질로 세심히 관찰하며 마음속으론 어떤 걸 고를지 고민하며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바로 그렇게 서있었으니까.

오븐치킨, 후라이드치킨, 매콤치킨, 달콤치킨, 부위별 치킨 등 온갖 치킨들에 할인 스티커가 착착 붙어나갔고 마음속 결정을 끝낸 사람들은 누가 채갈새라 하나 둘 상품들을 집어가기 시작했다. 속속들이 없어지는 상품을 보면서도 나는 자꾸 망설여졌다. 앞서 말했듯 닭을 그리 좋아하진 않아 어떤 걸 먹어야 좋을지 결정하지 못해서였다. 한참을 망설이는 사이 진열된 상품들은 점점 사라져 갔고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결국 이러다간 아무것도 남아나질 않겠다 싶어 깐풍기를 하나 집어 들었다(깐풍기도 닭이니깐). 아 그런데 웬걸. 깐풍기를 집어 들고 보니 초밥세트가 눈에 들어온다. 초밥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치킨보단 선호하는 편이고 또 색색이 들어있는 모양새가 이뻤기에 먹어보고 싶었다. 10시가 다 되는 시간까지 한 끼만 먹고 버텼으니 배도 고팠고 말이다. 결국 (할인 바코드가 큼지막하게 붙은) 커다란 초밥세트와 커다란 깐풍기를 들고 룰루랄라 마트를 빠져나와 숙소로 들어왔다.

혼자 다 먹을 수 있을까?


숙소에 오니 어느덧 10시가 넘었고 나는 재빨리 테이블 위에 가져온 초밥세트와 깐풍기를 올려놓았다. 그런데 양이 후덜덜하다. 이 정도 양이면 두세 명이 파티를 해도 될만하다. 이걸 혼자 먹으려 샀다니....

하지만 뭐 어떠랴. 오늘이 초복인데. 땀도 많이 흘렸고 또 복날이고 하니 나 홀로 심야의 파티라 생각하면 되지. 아무튼 친구의 안부 덕분에 간만에 포식을 하게 생겼다. 친구가 이 글을 읽을린 없지만 멀리서 마음으로나마 건강을 염려해 준 오늘의 친구에게 감사한다.






후기


양이 너무 많아 결국 다 못 먹었습니다.... 그래도 초밥은 다 먹었고 깐풍기도 반 이상은 먹었으니 나름 선전했다 생각합니다. 아까는 배가 고팠지만 지금은 친구 덕분에 배도 볼록하고 마음도 볼록합니다.


본격적 더위가 시작된다는 삼복의 초입입니다. 몸을 보양하는 몸보신도 좋지만 서로를 위해주는 작은 마음이 있음에 저는 감사합니다. 별것 아닌 작은 말들이 때론 큰 위로가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합니다. 그건 주변 사람에게서 올 수도 있고 지나는 차에서, 혹은 어떤 글에서, 또는 라디오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오래전 심각한 고민을 하며 버스를 타고 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랍게도 버스에서 들려오는 라디오에서 제 고민에 대한 대답이 흘러나왔습니다. 마치 신이 어딘가에서 제 고민에 대한 해답을 라디오진행자의 입을 빌려하는 것 같은 신비한 경험이었습니다. 오늘의 글이 어떤 이에겐 그렇게 다가간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생각을 잠깐 해봅니다. 그렇지 않다 해도 괜찮습니다. 글을 씀으로 해서 적어도 '나' 하나는 위로와 감사를 받았으니까요. 그래도 제 글이 그런 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 앞으로 그런 글을 쓸 수 있길 희망하고요.


장마와 더위에 쉽게 지치는 요즘, 비단 이 글이 아니라도 다른 어떤 것에서라도 여러분이 가진 고민에 대한 해답을 마법처럼 얻을 수 있길 바랍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부디 더위에 몸 상하지 마시고 내리는 장맛비에 해묵은 상처를 씻고 찬란히 뜻깊은 여름날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매미 소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름, 복(福)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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