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온도가 31도가 되면 우리 집 에어컨이 켜진다.
30도까진 어찌어찌 선풍기로 괜찮은데 31도부턴 잠드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더워지기 때문이다.
우리 집 실내온도가 31도로 오른 건 지난주였고 나는 온도를 확인하자마자 지체 없이 에어컨을 켰다. 일 년간 굳게 닫혔던 하얀 문이 마침내 스르르 열리고 신의 손길 같은 차가운 바람이 이내 쏟아져 내렸다. 한여름에 이만한 축복이 또 어디 있을까? 일 년 만에 켜보건만 에어컨은 고장 없이 잘 돌아갔고 남은 건 이제 시원하고 쾌적하게 여름을 나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3일 후, 나는 에어컨을 껐다.
실내온도가 떨어져서도 아니고 전기세 폭탄을 걱정해서도 아니다. 지구를 위한다는 훌륭한 이념때문도 아니다. 에어컨을 끈 건 그런 이유들이 아니라 그저 덥고 싶어서였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다. 덥고 싶었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에어컨이 없었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가 없을 때도 있었다. 더위에 지친 어린 시절의 어느 날, 선풍기도 없이 단칸방에서 무더위를 온몸으로 받아내던 우리 가족은 여름에 지쳐 넋을 잃고 앉아만 있었다. 눕지도 못했다. 더위가 심할 땐 눕는 게 더 힘들다. 방바닥이 한 겨울의 구들장처럼 뜨끈뜨끈하기 때문이다. 참다못한 아버지는 갑자기 일어나 밖으로 나가셨고 잠시 후 심하게 낡은 선풍기 하나를 손에 들고 마치 영웅처럼 다시 나타나셨다. 어딘가의 고물상에서 산 것이리라. 낡고 누렇게 색이 바랜 선풍기였지만 우리 가족은 두 눈이 동그래진 채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환호를 지를 힘도 없었던 것이다). 오래된 선풍기는 경운기 마냥 요란한 굉음을 내며 덜덜거리며 돌아갔지만 바람만큼은 시원했다. 아니 솔직히 시원한 바람은 아니었다. 무더위 속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더운 바람이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아버지와 낡은 선풍기가 내는 굉음을 기억한다.
에어컨을 처음 가져본 건 내 나이 마흔이 되어서였다. 그전까진 선풍기로 모든 여름을 지냈다.
덥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랬다. 더웠다. 그것도 무척 더웠다. 그래도 그렇게 지냈다.
더위가 감당이 안될 땐 물에 적신 수건을 냉장고에 넣었다 꺼내길 반복하며 여름을 난적도 있었다. 어떤 여름은 너무도 더워 바깥에 나가 잔적도 있었다. 그런 더위엔 선풍기도 얼음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밤이 되면 더위에 지쳐 어찌어찌 잠이 들었다. 그렇게 수많은 여름날을 지냈다.
여름에 관한 기억 중 또 하나는 이십 대 중반쯤의 여름이다. 그때 어떤 모임에 갔다가 그곳 사람들과 함께 더위도 식힐 겸 근처의 카페에 팥빙수를 먹으러 간 적이 있다. 그 해 여름도 무척이나 더웠는데 뙤약볕을 뚫고 카페로 들어간 나는 그곳을 가득 채운 냉기에 깜짝 놀랐다. 그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이 훤히 보였던 그 카페에 앉아 사람들과 팥빙수를 먹고 있으니 춥기까지 했다.
순간 너무 이상했다. 통유리 너머 보이는 바깥은 분명 태양이 작열하는 불볕의 공간이건만 이곳에 앉아 있는 나는 추위에 떨고 있으니 정말 이상했다. 얇은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곳과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때 알았다.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세상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걸로 가득하다는 걸. 사람들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말만을 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우리 모두 누구의 말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걸.
올해도 어김없이 뉴스에선 연일 폭염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고 낮시간 핸드폰엔 폭염경보 알람이 수시로 울려댄다. 여름의 절정에 온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에어컨을 켜지 않고 지내고 있다. 안 덥냐고 묻는다면 덥다고 답하겠다. 물론 덥다. 이 날씨에 덥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나는 40년을 에어컨 없이 살아왔다. 그 40번의 여름은 매년 더웠다. 여기에 다 적지 못한 더위에 관한 기억들은 아직 많다. 그렇게 매년을 더위에 시달렸지만 그 시간들이 나쁜 기억으로 남은 건 아니다. 더위속에 살아왔던 그 시간들은 그저 지나간 추억일 뿐이다.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릴 마음도 없는 그런 시간들. 지금의 나를 만든 나에겐 소중한 추억들. 나는 그 시간들을 지나와 지금의 내가 되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덥다. 그래도 글은 쓸만하고 무더울 망정 지낼만하다. 선풍기가 열일을 하는 덕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내일이라도, 아니 지금이라도 당장 에어컨을 켤 수는 있다. 그러면 곧 시원해지리라. 나는 에어컨이 있어도,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으니 켜고 끄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고 있는 건 덥고 싶어서이다.
폭염이라 하지만 이제 여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밤 나절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 그것을 말해주고 매미 소리에 섞여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가 그것을 말해준다. 이번 여름은 왠지 무언가가 아쉽다. 그래서 이 짧은 여름이 가기 전 될 수 있는 한 더위를 좀 더 오래 느껴보고 싶다.
올해 여름은 정말 덥고 싶은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