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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추억 <안녕 2024>

새해 인사

by 천우주


한 해의 마지막 날.

다시 또 그날에 도착하여 거울 보듯 나를 보며 올 한 해 어땠는지 기억해 봅니다.

1월부터 시작한 기억의 탐색은 2월과 3월을 빠르게 지나 여름과 가을을 훑고 금세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인상 깊던 몇몇 가지 순간들에 잠시 멈췄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365일, 8,760시간, 525,600분, 31,536,000초를 빛이 되어 지나왔습니다.


'찰나'


말 그대로 찰나입니다. 내가 지나온 길, 다사다난한 1년이 찰나로 변해 꼬리처럼 나의 뒤에 길게 따라옵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여행자입니다. 빛의 꼬리를 반짝이며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여행자.


1년을 탐색한 김에 그보다 먼 기억들도 찾아봅니다.

역시나 찰나의 속도로 일생이 지나갑니다.

하지만 그중 어떤 것들의 기억에 나는 넋을 잃고 멈추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기억.

커다란 빨간 고무통에 앉아 나는 물놀이를 하고 엄마는 그 옆에서 빨래를 하던 기억.

출근 전 까칠한 턱을 비비며 내게 인사하던 아빠의 기억.

소변이 마려웠지만 부끄러워 선생님께 말 못 하다 끝내는 바지에 싸버렸던 기억.

부모님이 다투던 기억, 심하게 혼났던 기억, 친구들과의 기억, 가난했던 기억, 울었던 기억, 웃었던 기억.

좋았던 일과 나빴던 일들.

그 모든 오래된 기억들이 몽롱하고 따뜻한 똑같은 빛으로 반짝입니다.

그것은 추억입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가 추억으로 변해 내 마음을 살살 간질이고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그 느낌에 살포시 바보처럼 혼자 웃습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도 있습니다.

학창 시절의 기억, 군대에서의 기억, 사회생활의 기억, 연인과의 기억, 또 많은 기억.

그곳에서도 여전히 나를 붙잡고 한참을 머무르게 하는 기억들이 군데군데 따뜻하게 반짝입니다.

역시 추억입니다.


기억은 선악을 지니고 좋음과 나쁨을 내포하며 즐거움과 괴로움을 주지만 추억은 따뜻할 뿐입니다.

눈부시게 지나가는 찰나를 붙잡고 쉬게 할 만큼 따뜻할 뿐입니다.

상처까지도 아련하게 따뜻할 뿐입니다.

다시 내 뒤를 돌아봅니다.

길게 이어져 반짝이는 빛을 내며 따라오는 기억의 꼬리 속에 작고 예쁜 따뜻함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따뜻함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의 내게 이어져 등 뒤로 온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몰랐습니다. 나를 나아가게 하는 온기가 그곳에서 오는지. 살아갈 용기가 그곳에 있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추억이 된다는 걸.

추억이 많을수록 따뜻해진다는 걸. 용감해진다는 걸.

내가 살아가는 건 지난날의 따뜻함 덕분입니다.

나를 감쌌던 그 많은 온기들 덕분입니다.


2024년.

좋았던 일도, 그렇지 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싸우고 화해하고, 웃고 화내고, 기쁘고 슬펐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했고 사회적으로도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다행히 또 한 번 한 해의 마지막에 이르렀습니다.

아플 수 있었고, 다칠 수 있었고, 쓰러질 수 있었고, 절망할 수 있었지만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기적 같은 모든 것의 덕분입니다.

2025년도 그러할 것입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오가며 정신없이 보낼 것입니다.

빛의 꼬리를 늘리며 그렇게 지나갈 것입니다.

추억의 온기를 입고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2025년의 끝에 또다시 설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나는 바랍니다.

기억이 추억으로 변해가길.

내 안의 냉랭함이 흩어져 보다 따뜻해지길.

그리고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작은 추억이.

그래서 그가 나아가는데 한 톨의 따뜻함이라도 보탤 수 있길.

그런 글을 쓸 수 있길. 그런 삶을 살 수 있길.

나는 소망합니다.



안녕 2024년.

언젠간 너의 모든 날들이 추억으로 변하길.










한 해의 마지막, 그리고 새해.

모두들 부디 따뜻한 추억을 많이 발견하는 날들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추억 속에 잠시 쉬며 행복한 새해를 맞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가 지금 이 시간 집 안에 편히 앉아 이렇게 글을 쓰며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는 건 모두 여러분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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