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매니저는 심각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았다.
'오전 9시....'
얼굴을 찌푸리며 시선을 거둔 그는 산만한 책상 위에 수첩과 도면을 펼쳐 작업의 진행 상황을 하나하나 다시 체크했다.
'2층과 3층은 완료됐고... 1층과 4층이 문제군. 우선 4층부터 가봐야겠군.'
그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 뒤 도면과 수첩을 챙겨 일어났다.
대형 쇼핑몰의 매니저인 B는 내일로 다가온 리뉴얼 오픈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대부분의 작업이 마무리되긴 했지만 끝까지 긴장을 놓칠 순 없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완벽주의자이자 원칙주의자였다. 사내 규정집을 외우다시피 했고 사소한 것 하나도 확인하지 않고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런 만큼 그의 일처리는 두 번 손댈 것 없이 뛰어났다. 덕분에 이번 리뉴얼 프로젝트의 총괄도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을 모두가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남들보다 배는 더 일하고 배는 더 스트레스를 받아야 함에도 원칙과 완벽을 고수하는 하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불통(不通)'이라 수군거렸다. 그것은 자신만 모르는 그의 별명이기도 했다. 특히 같은 팀원들은 그를 더욱 싫어했다. B매니저의 얘기만 나오면 소름이 끼친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사무실을 나와 4층으로 향하던 B매니저는 최주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최주임 어디야? 1층? 거기서 뭐 하는데? 그래? 알았어. 그거 잠시 놔두고 4층으로 올라와. 지금 바로."
전화를 끊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주임이 비상계단문을 열고 헐떡이며 나타났다. 몹시 숨이 가빠 보였지만 표정은 밝았다.
"네 매니저님."
"너 4층 도면이랑 어제 본사에서 내려온 지침 가지고 있지?"
B매니저의 말에 최주임은 손에 들린 두툼한 종이 뭉치를 뒤지기 시작했다.
"네 여기 있습니다."
그는 서글서글한 웃음을 띠며 공문과 도면을 내밀었다.
"여기 봐봐 여기, 이거 내가 어젯밤에 지침대로 처리해야 된다고 했는데 제대로 안되어 있어. 아무리 봐도 이건 지침이랑 틀리잖아. 왜 그런 거야? 너 어젯밤에 확인 안 했어?"
"아 네. 그게 어제 새벽에 자재가 도착하지 않는 바람에 임시 조치만 해놓은 상황입니다. 확인해 보니 생산 일정에 문제가 생겼다네요. 오후 1시~2시경엔 도착한다고 하니 그때 제대로 마무리하기로 작업자와 커뮤니케이션했습니다. 대신 이쪽 작업이 보류되었으니 1층 작업을 우선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고요. 지금 그거 확인한다고 내려가 있었습니다."
심각한 얼굴로 날 선 질문을 하는 B매니저에게 최주임은 웃음 띤 표정으로 차근하고 예의 바르게 설명했다. 그의 서글한 표정 때문인지 B매니저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래? 알았어. 그럼 같이 내려가 보자고. 참, 어제 밤샜는데 안 피곤해? 내려간 김에 작업 상황 보고 나서 커피나 한 잔 하자."
"오 좋죠. 안 그래도 커피가 마시고 싶던 참이었습니다. 팀장님도 피곤하시겠어요. 요즘 계속 아침 일찍 나오시잖아요. 퇴근도 늘 늦으시고."
"내가 맡은 일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아 그리고 알지? 오늘도 밤새야 된다. 나도 그럴 거니깐."
"그럼요, 물론이죠."
"잠은 좀 잤어?"
"새벽에 잠깐 눈 좀 붙였습니다."
"그래 잘했네. 내려가지."
둘은 비상문을 열고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갔다.
최주임, B매니저가 가장 믿고 아끼는 에이스.
모든 팀원들이 B매니저를 꺼려했지만 최주임은 달랐다. 그는 B의 어떤 까다로운 지시도 불만 없이 이행했고 어떤 때라도 밝은 표정으로 그를 대했다.
사실 최주임은 누구에게나 밝았다. 모두가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B매니저는 누구보다 신뢰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 많은 걸 가르쳐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이야, 오늘 날씨 참 좋네."
B매니저는 계단을 내려가며 비상계단의 커다란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감탄하며 말했다.
"진짜 좋은데요. 아무래도 내일 대박이 나려나 봅니다. 하긴 매니저님이 그렇게 고생하셨는데 안 날 리가 있나요, 하하."
특유의 넉살로 맞장구를 치는 최주임의 말에 오전 내내 짜증스러웠던 B의 마음이 슬며시 누그러졌다.
이튿날 밤, 퇴근 시간.
수많은 일들이 지나갔고 리뉴얼 오픈도 무사히 끝났다. 매출은 목표를 훨씬 상회했으며 모든 임원진 또한 만족해했다. 성공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최대 공은 단연 B매니저에게 돌아갔다.
"휴우...."
B매니저는 4층 매장까지 폐점이 완료된 걸 보고 나서야 비로소 시원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뉴얼 기간 내내 찌푸렸던 그의 얼굴이 그제야 완전히 풀어졌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밤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전날 오전 6시에 출근해 지금까지 있었으니 꼬박 40시간을 일한 셈이다. 그의 얼굴에 두껍게 덮여있던 짜증은 어느새 피곤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옆에 있던 최주임이 깍듯이 고개 숙이며 말했다. 여전히 밝은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퇴근했어?"
"네. 좀 전에 다 퇴근했습니다."
"쯧, 사람들이 말이야 양심도 없지. 우리가 이렇게 지금까지 개고생을 했는데 마무리라도 좀 하고 가야지."
B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최주임 너 반만큼만 일해도 좋겠구만 말이야."
"별말씀을요. 매니저님이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너도 고생 많았어. 오늘 매출도 그렇고, 아까 임원진들 얼굴 너도 봤지? 다들 좋아하는 거."
"네, 매니저님이 워낙 철저히 하셔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이제 알겠지? 평소 내가 꼼꼼하게 일하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만약 K나 E가 주도했어 봐. 오늘 난리 났을걸? 걔네들은 몰라.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도 이번에 많이 보고 배웠습니다."
"그래, 힘은 들어도 이렇게 해봐야 경험도 늘고 실력도 느는 거야. 이런 게 다 나중에 너한테 큰 도움이 된단 말이야. 어쨌든 고생 많았어. 우리도 이제 퇴근하자"
둘은 전날 아침과 마찬가지로 4층의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B가 앞서고 최주임이 뒤를 따랐다.
밤이 된 비상계단의 창엔 풍경 대신 실내가 비쳤다. B는 계단을 내려가며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살이 좀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만도 하지. 한 달을 고생했는데.'
그는 자신 뒤에 비치는 최주임을 흘깃 보았다. 그 역시 많이 피곤해 보였다. 그래도 젊으니 금방 회복하리라.
"최주임 너 내일부터 휴무지?"
"네. 2일간 휴무입니다."
"뭐 할 거야?"
"그냥 잠이나 좀 푹 자려고요."
"그래. 너도 피곤할 거니 푹 좀... 아! 맞다!!"
B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끊었다.
"깜빡했는데, 아까 저녁에 본사에서 메일이 하나 왔더라. 내일 1층쪽에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내일부터 휴가잖니. 너마저 없으면 그 일을 누가 챙기겠냐. 내일 그것만 좀 처리하고 모레부터 쉬어라. 인사과엔 내가 말해 놓을게."
"...."
"알겠지?"
뒤따라오던 최주임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B가 재차 물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매니저님."
밝은 목소리였다.
"너밖에 없다. 내가 너 믿고 푹 좀 쉬다 올게"
"걱정 말고 휴가 잘 다녀오십시오."
최주임이 밝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B는 자신을 보며 늘 짓던 그의 얼굴이 연상되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B는 본능적으로 비상계단의 창을 보았다. 거기엔 섬뜩한 무언가가 있었다. 분노와 경멸로 번들거리는 찢어진 두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더럽고 불쾌하며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밟아 죽이고 싶은.
정수리에서 시작된 소름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B의 발바닥까지 훑고 지났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창을 다시 볼 마음도, 뒤돌아 볼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달래며 얼마 남지 않은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는 동안 끝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잘못 본 걸 거야, 잘못 본 걸 거야, 내가 잘못 본 걸 거야....'
"수고하셨습니다."
간신히 1층으로 나와 도망치듯 걸어가는 그의 등 뒤에서 최주임의 밝은 인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