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

by 천우주



그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
.
.


햇살에 일어나 바라본 오월의 “첫”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뿐이었다. 그래서,

내 가장 사랑하는 친구와 수다나 떨기로 했다. 녹색의 찬란한 풍경을 보며.





이른 아침의 첫 햇살에 눈을 뜬 '숨'은 옷장에 가지런히 걸어놓은 교복을 꺼내 단정히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초록색 재킷과 치마, 짙은 녹색의 조끼, 그리고 오월을 닮은 연두색 블라우스.

거울 속엔 풀색을 몸에 두른 친숙 하면서도 생경한 소녀 하나가 여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은 블라우스와 조끼의 단추를 끝까지 채운 뒤 옷에 붙은 먼지를 손으로 탁탁 털어내곤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그리곤 학교로 향했다.


휴일 아침의 학교는 조용했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일렀다. '숨'을 반긴 건 텅 빈 운동장에 숨어있던 차가운 아침 바람뿐이었다. 다행이었다. 분명 다행이었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교문은 열려 있었다. 사람하나 지날 만큼 조금이었지만 어렵지 않게 지날 수 있었다. '숨'은 약속 장소인 학교 건물의 꼭대기로 향했다.

친구 '결'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인사를 건네려 다가서던 '숨'은 잠시 멈춰서서 풍경을 혼자 즐기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앙상하고 여린 어깨를 가진 조그만 친구. 그 연약한 몸에 잠시 기대 쉴 수 있는 친구. 오늘따라 그 친구의 어깨가 더욱 작아 보였다.


"야 '결'! 벌써 왔어?"

"응. 왔어?"

"언제 왔는데? "

"좀 아까."

"너 진~짜 부지런하다. 어떻게 한 번을 나보다 늦는 법이 없냐? 오늘은 깨자마자 바로 달려왔는데. "

"치~ 네가 느린 거지."

”아니거든요. 네가 쓸데없이 빠른 거거든요. “

"우리 집은 가깝잖아."

"뭐래? 너네 집이나 우리 집이나 거기서 거긴데."

"하긴, 암튼... 앉아."


둘은 나란히 앉아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았다.

옥상에서 바라보는 오월의 앞산 풍경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참나무와 소나무, 단풍나무,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풀과 나무들이 초록의 물결을 이루며 부드럽게 펼쳐졌고, 눈부신 햇살과 푸른 하늘은 찬란히 빛났다.

바람이 불어왔다. 싱그런 향기를 머금은 차갑고 시원한 바람이 '숨'의 얼굴에 닿았다.


"야~ 시원~하다. 오늘은 어째 바람이 더 시원하게 느껴지냐. 좋다~"

"공부 안 하고 땡땡이치니깐 그렇지."

"땡땡이 아니거든. 자습도 아직 멀었거든. 가방도 챙겨 왔거든."

"피~ 공부 안 하고 노는 걸 전문 용어로 땡땡이라고 부릅니다요."

"그러려나? 아! 그리고 결 너! 요즘 다이어트 하지? 좀 전에 가만히 지켜보니깐 더 말랐더란 말이지. 너 그러다 쓰러진다. 밥 좀 먹고 다녀라. 공부도 다이어트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뭐래. 밥은 네가 잘 안 먹으면서. 매일 과자 부스러기만 겨우 먹잖아. 그게 더 건강에 더 안 좋다더라. 그리고 다이어트는 무슨. 나는 원래 찌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거든."

"오호라! 아이돌 몸매라 이거지? 그래 부럽다 부러워. 내가 아이돌이랑 친구도 해보고.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알았으면 앞으론 공손히 모셔라 이것아."

"네네~ 아이돌 마마,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됐네요. 간지러워서 못 듣겠다. 암튼 난 니가 부럽다. 공부도 잘해, 착해, 부모님 말씀도 잘 들어, 거기다 얼굴도 이.. 쁘...... 게 복스럽지."

"하이고 나야말로 됐네요에 엎드려 절 받기다. 그리고 이쁘면 이쁜 거고 복스러우면 복스러운 거지 이.. 쁘.... 게 복스러운 건 또 뭐냐? 차라리 말을 말든가."

"야 너, 이쁘게 복스러운 게 얼마나 좋은 건데. 옛날 왕족이나 귀족들이 다 그렇게 생겼어요. 이쁘고 복스럽게."

"그렇단 말이지. 흠흠....(목소리를 낮게 하고)그럼 하나 묻겠다. 내가 왕이 될 상인가?"

"......

......

......"

"야야 좀 웃어라 웃어. 내가 요새 이 대사를 얼마나 연습하는데."

"하? 하? 하? 하하하??!"

"치, 됐다. 너랑은 말 안 할래."

"아유 삐지기는 알았어 알았어. 웃어줄게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우헤헤헤하하하하, '숨' 폐하 배꼽이 빠져 찾을 수가 없사옵니다. 됐지?"

"......

......

......"

”어? 진짜로 말 안 하려고? “

"......

......

......"

"알았어 알았어. 오늘 내가 빵 쏜다."

"엇? 정말? 앗! 말했다. 에이, 오늘은 너랑 말 안 할 생각이었는데 그놈의 빵 때문에.... 오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빵숨."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어? 웃었다?!"

"그래 빵 터졌다."


소녀의 웃음소리와 함께 녹색의 야산 위로 하얗고 커다란 구름이 그림자를 끌고 미끄러지듯 지났다. 멀리서 새소리가 들렸다. 녹음 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짝을 찾는 노래였다. 태양은 아침을 조금씩 밀어내며 솟아올랐고, 길 위로는 차들과 사람들이 조용히 지났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아무 일 없는, 그리고 아무 일도 없을 평화로운 저마다의 사람들.


"참 시험은 어땠어?"

"뭐 그럭저럭...."

"망쳤어?"

"아니."

"그럼?"

"잘 보긴 했지, 했는데…."

"했는데?"

"......"

"얜 뭐 말을 하다 마니, 궁금하게시리."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네가 잘 봤으면 잘 본 거 아냐?"

"나도 그랬음 좋겠다..."

"그래도 네가 잘 봤다 생각하면 그걸로 됐어.”

"나도 진~~ 짜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인정해 줄게. 우리 '숨'이는요 시험을 잘 봤거등요. 1등이거등요."


친구의 말에 숨은 배시시 웃었다. 좋았다. 믿어주는 친구가 있어서. 인정해 주는 소녀가 있어서.


"학교는 좀 어때?"

"학교? 음... 좀 지친다고 해야 할까?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요즘엔 통 재미가 없네. 지겹기도 하구."

"너희 반 애들은 여전히 그래?"

"애들? 응... 걔들이야 뭐.... 늘 그렇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애들이라 그렇지."

"그럼 뭐 난 어른이냐?"

"키는 어른이지."

"싱겁긴."

"그래도 내가 있잖아."

"그래. 맞다. 네가 있지. 너만 있음 다른 애들 다 필요 없다 난."

"어이구, 그걸 이제 아셨어요?"


어느덧 아침이 야산 아래 저물고 동그란 해는 따뜻함을 더했다. 바람도 잔잔해졌다. 하나 둘 학생들이 학교를 향해 오고 있었다. 풀색의 교복을 입은 자그마한 아이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여행을 떠나는 어린 나무들 같았다. 목적지가 없는 여행, 목적지를 잃은 여행. 언젠지 어딘지 모를 그곳을 향해 그들은 열심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 평화롭다."

"평화롭지."

"풍경은 왜 저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울까? 쓸데라도 있어서 그런 걸까?"

"그러게."

"무슨 대답이 그러냐."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알겠어."

"그렇네."


"근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글쎄......"


고요하고 아름다운 초록의 물결을 바라보던 '숨'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이제 가야겠다."

"정말?"

"응."

"빵은?"

"다음에 사 줘."

"괜찮겠어?"

"응."

"어디로 갈 건데."

"알잖아."


자리에서 일어난 '숨'은 난간에 선 채 풍경을 바라봤다.

때마침 바람 한 줄이 '숨'의 얼굴을 그대로 스쳐 지났다. 짝을 찾는 새소리가 다시금 들려오고 오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갈 곳 잃은 여행을 하는 어린 초록의 나무들도 더욱 많아졌다. 아무 일도 없고, 그리고 아무 일도 없을 평화로운 각자의 사람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것들.

'숨'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정말 갈 거야?"

"응."

"나는?"

"넌......"

"나는?"

"너는......."

"......"


"너는......."


"너는...... 나잖아. 아무 데도 없고 아무도 찾지 않는 풀색의 소녀야."


풍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 녹색의 물결이 부드럽게 펼쳐지고 파란 하늘을 막힘없이 볼 수 있는 곳. 모든것이 통과해 지나는 곳. 그곳의 난간에 풀색의 옷을 입은 '숨'이 앙상하고 여린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
.
.



d19f12ad3148590696157e8c869720b0e8b885e168e2cc5289f261d936085175.png


이전 03화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