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료하다

2021년 05월 13일

by 천우주

바깥 날씨는 약간 흐리다.

나는 조금 있으면 출근을 한다.

흐리멍덩한 풍경에서 눈을 돌려 먼지 쌓인 좁은 방안을 살펴본다.

한쪽 구석엔 영어공부를 해보기 위해 사놓은 책 몇 권이 아무렇게나 쌓여있고 책상 위엔 펼친 지가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 먼지 쌓인 패드가 놓여있다. 눈에 보이진 않는 한편의 공간엔 오래전 그렸던 습작 덩어리 그림들이 마치 보물인양 조용히 숨겨져 있다. 쓰임새를 잃어 퇴화한 꼬리뼈 같은 것들.

꼬리뼈는 웹에도 있다. 망망한 인터넷 어딘가엔 참 여러 가지로 주절거렸던 말도 안 되는 비문들의 파편이 목적도 없이 돌아다닌다. 찾을 수도 없고 찾을 마음도 들지 않는 나의 부스러기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날씨를 힐끗 보고 방 안을 둘러볼 뿐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는다.

이상은 박제된 천재라도 되었지만 나는 그냥 박제품이다.

자판만 두드리는 박제품.


다리를 다쳐 한 달 조금 넘게 깁스를 한 적이 있었다.

깁스를 풀던 날 나는 놀랐다.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고작 40일이었다. 고작 40일 움직이지 않았다고 수십 년을 움직였던 내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몸도 그런데 마음이라고 다를까?

무료하게 박제된 마음은 이제 영원히 움직일 수 없는 걸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 마음이 언제부터 이렇게 멈춰버렸는지.


무료하다.

시간을 널리고 널렸건만 나는 100세 노인의 자세로 하루하루를 지낸다.

하지만 100세가 아니기에 에너지는 남아돈다. 남아도는 에너지를 바라만 본다.

마치 못이 박힌 타이어처럼 천천히 바람이 빠지기만 기다린다.

세상이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내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그렇지만 모든 게 정지된 건 아니다. 아직 뱃속까지 보형물이 들어찬 건 아니다.

못을 제거하고 땜질을 하고 다시 바람을 채워 달리고 싶다. 그런 마음이 아직 남아있다.

하지만 타이어에 박힌 못은 눈으로 보고 찾을 수 있지만 마음에 박힌 못은 도대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못을 찾는 것보다 찾으려고 마음을 먹고 움직이는 게 갑절은 더 힘들다.

얼마 전 친구들을 만났다.

수십 년을 알고 지내온 이들이건만 그들의 말이 다른 나라 언어처럼 들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알지만 모르겠다.

알지만 모르는 것.

정말 그렇다.

알지만 모르겠다.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 그러하다.


무료하다.

어쩌면 내가 바라는 것이 무료함일 수도 있겠다.

다만 기분을 느끼고 싶은 것뿐일 수도 있겠다.

위로받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대도 무료하다.

일을 하러 가야겠다.

방 안에 쌓인 먼지는 그대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행복 목욕탕